문숙 선생님이 쓴 자연 치유에 관한 책을 읽다가 어느 구절에 한참 붙들려 있었다. 민들레 꽃을 따려고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이때껏 알지 못했던 아름다움에 눈물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꽃을 따려는 인간의 탐심이 부끄럽고, 또 그렇게 아름다운 존재가 가까이에 있었다는 게 고마웠다고 한다.
이럴 수가
사람이 이렇게 작은 자극에 붙들려 눈물까지 흘릴 수 있다니. 그런 살아 있는 감각이 부러웠다. 주변에 부는 실바람의 흐름과 풍경이 주는 작은 인상의 변화까지도 소소하게 느끼는 힘. 그것만큼 강한 것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뭐랄까. 이렇게 표현하는 게 좋겠다.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단절돼 있는 사람은 자신만 사랑하고 자기 감정만 느끼지만,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꽃 하나 바람 하나와도 이어져 있기에 더 넓고 강하고 유연하면서도 단단하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매일 일터에 나가 노동하면서 실은 무감해지는 훈련을 하는 것 같다. 코앞의 시간까지 반드시 질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니까. 밤을 새우고 스텝들을 다그친다.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감정을 다 존중하고 배려하면 시간과 예산을 맞출 수 없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못하면 무능하다는 낙인이 찍힌다. 나는 한편으로 내 일을 잘 해내고 싶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꾸역꾸역 결과물을 낸다. 그렇게 마치고 나면 미안한 것들이 잔뜩 생각난다.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내가 밀어붙였을 때 상대가 어떤 감정인지 생각하지 않는 연습을 (나도 모르게) 하는 것 같다. 근데 인간의 감각이란 미묘하게 다 연결되어 있어서, 이렇게 내 밖의 감정과 인상을 느끼는 촉수를 마비시키다 보면, 내가 예술작품을 보거나 책을 읽을 때 느껴지는 바도 점점 적어지는 것 같다. 사람들의 감정이 나한테 전해 오는 통로도 좁아지는 듯 하고... 더듬이가 점점 짧아진달까.
그래서 결국은 양파의 달착지근함이라든가 호밀빵의 고소함보다는 짭짤한 버거의 인위적인 맛을 선호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리고 허덕지덕 멘털 붕괴 직전에 가까스로 찾아온 휴식일 수록 더욱 이런 자극에 탐닉한다.
아, 이대로 살다가는 미국 영화에 나오는 잘생긴 주인공 - 그 배경에서 허겁지겁 감자튀김을 먹고 있는 거구의 털보 아저씨 같은 인상의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