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겨울을 맘껏 누렸던 그 하루
"오늘은 어디로 갈 거예요?"
같은 방을 썼던 언니가 물어보셨다.
"저희 오늘 큰 계획은 없는데 숙소를 옮겨야 해서 멀리는 못 가고, 주변에 프라하성에 다녀올까 봐요!"
"아, 그럼 우리 같이 이따 맥주펍에 갈까요?"
이 글과 함께 추천하는 크리스마스 캐롤
https://www.youtube.com/watch?v=uplpHhp0foA
일어나서도 오늘 하루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는데, 아침부터 기분 좋은 약속이 잡혔다.
언니와의 약속에 앞서, 우리 자신과 한 선약을 먼저 지키기 위해 프라하성으로 향했다.
한인민박 아침식사로 주인 분들이 직접 요리해 주신 돈가스와 쫄면을 맛있게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입 밖으로는 뜨거운 입김이 나오고 있음에도 아직까진 버틸 만한 추위다.
12월의 프라하는 거의 매일 눈이 조금씩 오고 있나 보다. 거리 부분 부분 눈이 쌓여있다.
숙소에서 프라하성에 가기 위해선 트렘을 타야 했고,
우리는 트렘에 올라서자마자 내부 기계를 통해 티켓을 끊기 위해 티켓머신 앞에 섰다.
어제 이맘때쯤 탔던 트렘에서 티켓 펀치를 못 찍어 난리 쳤던 일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기계 앞에서 티켓을 구매하고자 쌍둥이와 상의를 하던 중 우린 어떤 사실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오늘 하루 일정에 맞춰 시간권 티켓을 구매하려 보니 놀랍게도 우리는 오늘 세워둔 계획이 딱히 없었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무계획 여행이라곤 생각 못했는데.. 이렇게 막연하게 떠나온 유럽여행이 올해만 두 번이라니!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떠나온 여행이었는데, 몇 개월 새에 사람이 바뀌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여름엔 촉박하게 티켓을 끊었다는 변명거리라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냥 이런 우리였기 때문에 여행일정을 짜지 않았던 것이다.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오늘 계획을 트렘에서 즉흥적으로 급하게 세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 무난한 시간대를 선택하되 그 시간이 끝나면 멀리 나가지 말자는 결론을 내렸다.
(여행에서 멀리 나가지 말자는 결론을 내린 우리도 참 미련한 걸까, 대담한 걸까.)
구글맵을 보니 이제는 내려야 할 때인가 보다.
도로나 보도블록이 아닌 곳에는 눈이 제법 많이 쌓여있다.
트렘에선 내렸지만 프라하성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찾지 못했던 우리는 군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같은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한국 사람이 보이는 걸 보니 맞는 길로 가고 있나 보다.
유럽여행에서 한국사람들이 보이면 보통 같은 곳을 향해있더라. 사실 일상에서도 다수의 무리들이 당연하다듯이 한 길로 걸어가는 것을 최대한 따라가지 않으려 하는데, 이렇게 따라가다 보면 확실히 편하긴 하다.
우리의 인생도 이럴 텐데, 아직은 나의 길을 온전히 찾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프라하성을 찾게 된 건 지인이 나에게 오래전 보여줬던 어느 한 사진이 계기였다.
그 사진엔 프라하성에 가는 길목에서 하프를 치는 여성의 모습을 담겨 있었는데 뒤쪽의 푸릇한 배경과 그녀의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한국의 길거리에선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라 그런지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박혀있었다.
너무 추운 날씨라 버스킹 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러면서 내심 기대감에 차 있었는지 결코 프라하성을 일정에서 포기하진 못했다.
"♬♪"
그리고 이곳에 잘 왔다고 환영이나 해주는 듯, 프라하성에 미처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그 장면을 만나버렸다.
비록 나의 배경은 눈 덮인 하얀 프라하였지만,
손이 시려 빨간 손으로 기타를 잠시 내려놓으셨지만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들을 하나씩 이뤄나가던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인생에서 이런 순간을 주기적으로 만난다면 내가 지금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선 오랫동안 기다릴 상대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만나기 위해 꾸준하게 노력해야 할 테니 그 과정만으로도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프라하 거리를 걷다 보면 크리스마스가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곳곳에 놓인 각양각색의 트리를 보고 있으면
마음 안 깊숙한 곳에서 현실이 너무 지독해서 영 잊고 살았던 낭만을 꺼내 올만큼 달달한 캐럴이 울린다.
프라하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은 짧은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7세기 연금술사와 과학자들이 이 골목에 모여 살았다는 이유로 '황금소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 이곳은 중세에 들어온 듯한 멋진 곳으로 복원되어 기념품 상점으로 이용되고 있었고
모두가 알 만한 소설《변신》의 저자인 프란츠 카프카도 이곳에 잠시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그의 흔적들을 느끼기 위해 많은 이들이 골목의 한 집에 북적였다.
그렇게 몇 분 동안 비탈길을 걷다 보니 성 비투스 대성당 앞에 도착했다. 대성당 주변 쌓인 눈들 사이로 크리스마스마켓들이 열려있었고, 환한 낮에 마켓을 마주했음에도 몽글몽글한 마음이 일렁였다.
소시지와 따뜻한 펀치, 굴뚝빵. 추운 날 마주한 포장마차 어묵 마냥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음식들을 보고 어찌 지나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달랐다. 모두가 따뜻한 음식들을 제각각의 손에 들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까지 음식을 먹을 건 아니라는 판단에, 중앙에 놓여있는 큰 트리 옆에서 사진만 열심히 찍곤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아직 우리에게 프라하의 시간이 한나절을 더 허락되었기 때문에 그런지, 길거리 음식을 꼭 먹어야 한다는 다급함이 없었던 모양이다.
거진 600년이란 시간 동안 건축이 이어졌다는 성 비투스 대성당은 다양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모습으로 그 위상을 자랑했다. 유명한 명소라면 큰 관심을 가지지 않고, 누구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나답지 않게 이 공간에서는 한동안 입을 저억 벌린 채 내부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화려한 스테인글라스에 반사되는 빛들은 같은 곳에서 태어난 색인 듯 오묘한 조화를 이뤘고, 생각보다도 더 넓은 공간에 마음이 저절로 성스러워졌달까. (나는 무교다)
사실은 내부에 들어서자 아주 추웠던 바깥 기온과 철저하게 비교가 되어 점수가 더해진 것도 배제할 순 없겠다.
프라하성에서 나와 다음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 당장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겠다며 트렘을 타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낭만의 그곳, 우리는 까를교로 향했다.
까를교는 야경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이 추위를 생각하면 저녁에 까를교를 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트렘을 타고 까를교로 향하고 있던 중,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메신저에 뜬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 한동안 손이 멈칫거렸지만, 이내 같은 숙소를 쓴 여자 동생이란 사실을 알곤 버튼을 눌렀다.
"언니 혹시 프라하성에 갔어요? 누군가가 엄청 떨길래 많이 추운가 보다.. 했는데 언니였던 것 같아요 ㅋㅋㅋ"
오호라.. 자 이제 내가 얼마나 추워했는지 체감이 되실까요?
까를교로 향하기 직전, 스타벅스에 들렸다. 한국에서도 딱히 스타벅스를 즐겨 찾는 편은 아니었지만 우선 이 추위를 피해 따뜻한 커피로 몸, 아니 손이라도 녹여야만 했었다.
스타벅스 입구에 신메뉴라고 적힌 핫초코가 보인다. 핫초코가 실패할리는 없으니 자신만만하게 주문대에서 주문한 핫초코를 받았는데, 이게 웬일일까. 이상한 견과류가 씹히는 듯하더니 굉장히.. 불호인 핫초코를 여기에서 만나버렸다.
화가 난 코평수를 잠재우지도 못한 채, 또다시 내가 꿈꾸던 까를교의 버스킹 현장에 도착했고 다행히 이 장면에 정신을 뺏겨버렸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어르신들이 신나게 악기를 만지던 현란한 손길이 믿어지지가 않았는데, 특히 현악기나 키보드처럼 빠르게 손을 움직여야 하는 악기들은 어떻게 연주하시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지만 그것이 이해될 리가 만무했다.
여름의 프라하였다면 빨간 지붕들을 뒷배경으로 신나게 연주하는 사람들이 이 거리를 채웠으리라..
넓은 광장에서 비눗방울을 날리며 신나게 돌아다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도 훤히 그려졌다.
물론 두 계절 중, 언제를 고를래?라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겨울, 크리스마스의 프라하를 말하겠지만,
이 장면을 본 이상 여름의 프라하도 궁금한 것이 당연했다. 그 계절이 언제든 이곳은 낭만으로 가득 찼을 테니! 프라하의 연인이란 드라마 제목이 있는 것도 괜히 있는 것이 아닐테지.
버스킹 앞에서 한참을 바라도 보고, 사진도 찍으며 한창 음악을 시각적으로 즐기고 있는데 쌍둥이가 이제 그만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여름 런던 때처럼 그렇게 실컷 바라보다 돈을 내지 않으면 또 혼쭐이 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뭐 설마 그럴까?
했지만 그래도 그 당시 벌렁였던 심장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이어진 길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한참을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골목에 있던 어느 서점에 들어가니 한국어책도 있다. 우리나라의 위상.. 여기에서 또 느낀다. 우리나라에서만 유명해져도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시대가 왔다.
이 얼마나 좋은 시대인가.
시간을 보니 같은 숙소를 쓴 언니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다.
체코에서 유명한 흑맥주를 먹기 위해 코젤 직영점에서 약속을 잡았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청량하고 시원한 맥주를 좋아하는 편이라, 그동안 흑맥주를 즐겨마시지는 않았는데
코젤 직영점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줄 거란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가 잘 맞아떨어진다면 술에 대한 장르가 넓어지는 것이니 그것은 또 그거대로 곤란했다.
"오는 길에 트렘을 놓쳐서 오래 걸렸는데, 와 너무 춥지 않아요?"
이곳에 먼저 도착한 우리 다음으로, 약속 메이트 숙소 언니가 도착했다.
알고 봤더니 나를 제외한 두 사람들은 술을 잘 못 마신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곤 조금 실망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다행이다. 대낮부터 취해서 이곳을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코젤 생맥주 큰 사이즈 하나, 작은 사이즈 2개 주세요.”
치즈 프라이와 함께 코젤 생맥주 한잔. 이 조합만으로도 그날의 분위기와 기분이 떠오른다는 것이 참 좋다.
이 날을 기점으로 여행을 간다면 음식을 다양하게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 영상을 찍겠다며 휴대폰 그립톡을 세워 찍고 있는 나를 보고선 신기한 눈빛으로들 나를 보던 그들이었지만, 지금도 그때의 영상을 보면 분위기에 취해있는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여서 위안을 얻곤 한다.
맥주를 모두 마시고 주변인들의 선물을 사겠다며 주변을 돌았지만 그 사이에 더욱 낮아진 기온에서 많은 곳을 돌아다니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몸에 붙이는 난로까지 포함하여 무려 5개는 난로를 지니고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쇼핑을 포기하고 숙소를 다시 찾아 보관했던 짐들을 찾았다.
그 사이에 이곳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더 굵어지는 눈발에 우리의 정신도 홀려지는 듯 정신이 없어졌다.
그런 우리 눈에 포착된 굴뚝빵.
프라하는 굴뚝빵으로 유명한데, 초코가 들어가 있는 굴뚝 모양의 빵이 제법 추위를 든든하게 버티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물론 흘러내리는 초코 때문에 장갑이 더러워질 각오는 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약 3시간 후, 눈으로 덮혀진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 이야기
https://brunch.co.kr/@daawooon/24
* 위 사진들은 모두 오운 (@daa_wooon) 개인 권한 저작물이며, 개인/상업적 이용을 금하고 있습니다.
© 2022-2023. 오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