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반짝이던 어느 날 만난 내 인생 최고의 크리스마스 마켓
숙소에 도착하니 녹초가 되었다.
눈이 오기 시작할 때 '이게 겨울의 낭만'이라며 한껏 신이 났던 나는 사라진 지 오래다.
사실 내가 지친 건 눈의 결정체가 맨눈으로 보일 만큼 굵어진 눈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이건 아마 이전 숙소에서 보관했던 캐리어를 들고 나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느낀 복통 때문일 것이다.
앞이 하얘지고 머릿속엔 복잡한 심경만이 남아있던 그 급박한 순간,
우리는 겨우 숙소 앞에 도착했지만 그것도 잠시 프런트 데스크에 사람이 없다.
'하느님.. 부처님.. 제발.. 제발...'
5분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직원.
어렵게 어렵게 우리 숙소의 키를 받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 직원이 우리를 다시 부른다.
"이 엘리베이터가 지금 고장이라,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야 돼"
우리 숙소는 5층이었다.
무거운 캐리어 2개를 겨우겨우 들고 계단을 올라가니 우리의 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들어간 숙소를 구경할 틈도 없이 부리나케 화장실을 찾는 나..
그런데 숙소 화장실만 해도 우리가 예약한 방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모습을 자랑했는데,
영락없는 호텔방이었다.
심지어 한인민박에 자리가 없어 억지로 옮긴 방이었는데, 이 정도였으면 처음부터 여기에서 머물걸 그랬다.
차가운 추위 속에서 눈을 맞다 포근한 곳에서 따뜻한 물로 씻으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따뜻한 옷들을 마저 갈아입고, 아까 사 온 젤리를 먹으니 몸과 마음이 노곤해져 도저히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심지어 독일에서 늦은 새벽에 들어가 3시간 밖에 자지 못했고, 프라하 한인민박에서도 수다를 떨다 4시간 밖에 못 잤으니 잠도 부족했을 무렵이다.
하지만 우린 저녁이 다가온 이 시간에도 그냥 잘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 유감스럽게도 결항 때문에 프라하 하루치 일정이 날아갔고, 덕분에 우린 내일 오스트리아로 떠나야 한다. 그러니 프라하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즐길 수 있는 시간도 오늘뿐이란 소리다.
둘째, 오늘 저녁, 나의 로망이자 쌍둥이의 바람이었던 재즈바를 예약해 두었다. 특히 독일 결항을 같이 맞이한 한 언니와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더욱 더 이 일정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남은 시간을 자지 않고 사용하기 위해 우리는 이 멋진 집과 어울리는 일종의 스냅 사진을 찍기로 했다.
힙하게 나온다는 플래시를 서로에게 열심히 터뜨리며 30여분 정도 시간을 보냈을까,
더이상은 미룰 수 없는 외출을 마주하고 큰 결심과 함께 우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후움"
1층 로비에 도착해 큰 문을 열기 전, 세차게 들어올 차가운 바람에 각오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그 문을 연 이후에도 나는 숨을 쉬이 내쉴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 때문이었다.
분명 숙소에 잠깐 들어갔었던 것 같은데 벌써 하루가 지난걸까?
누군가 시간의 장난을 친 건가?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풍경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 잠깐 사이에 프라하가 흰 눈으로 덮여있었다.
그리고 그 흰 눈 사이사이로 비치는 주황빛의 따뜻한 빛들.
눈이 정말 많이 와 급격히 낮아진 기온과 추위에 카메라를 더 열심히 들지 못한 나 자신을 원망한다.
그때 느낀 감동을 말로도, 사진으로도 다 표현해내지 못할걸 알면서도
그 기억이 조금이나마 더 길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이때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내 감정과 가까이 만들기 위해, 이 사진만을 위해 사진 보정법을 바꿨다면 믿어질까? 뿌옇지만 반짝이는 선명함과 실제의 추위와는 다른, 뜨겁게 타오르는 프라하의 저녁을 담고 싶어.
숙소 옆 코너를 돌자 메인 스트릿이 나온다. 메인 스트릿에는 더 많은 눈들이 쌓여있었고,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이미 익숙한 듯 우산과 모자로 눈을 막아내고 있었다.
저 멀리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지만 마치 성같이 큰 건물이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수많은 나무들에 메여있는 빛들, 열차처럼 보였지만 오랫동안 그 자리에 정차해 있는 듯 보이는 개조된 레스토랑. 하이라이트는 우리가 굴뚝빵을 먹었던 큰 트리였다.
결항으로 프라하에서의 하루가 없어진 게, 이 풍경을 보고 그제야 큰 아쉬움으로 돌아왔다.
트리로 다가가자 누군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
"혹시 사진 좀 찍어줄 수 있나요?"
놀랍게도 그는 외국인 남자였다. 이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동양인은 우리뿐이었고, 그는 그 사람들 중에서 우리에게 사진을 부탁한 것이었다.
"그럼요!"
"어디에서 왔어요?"
"한국에서 왔어요"
"나는 Peter라고 해요. 이름이 어떻게 뭐예요?"
이 거리에서 갑자기 이런 대화가 이어지나?
보통 영화에서는 이렇게 인연이 되어 한번 더 마주치면 사랑에 빠지던데.
혹시 모른다. 형부를 만난 것일지도 ㅋ..
쌍둥이에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Peter에게 함께 사진을 찍어줄 수 있냐며 물어봤고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아쉽게도 그 사진은 휴대폰이 리셋되며 날아갔고, 그와 한번 더 마주치지 않아 사랑에 빠지지는 못했지만
아직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으니 그거면 됐다.
영화 속에서만 일어날 것만 같은 상황들이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
우리는 지금 프라하에서 가장 큰 크리스마스마켓을 찾아 걸음을 나섰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걸음을 서둘러야겠다. 눈이 더 세차게 온다.
도착한 크리스마스마켓은 우리가 어디 즈음에 서있는지 가늠이 안될 정도로 컸다.
이곳에 오기까지 마주친 풍경들은 빛이 어스름하게 흩어져있었다면, 마켓은 빛의 하나하나가 아주 강하고 밝아서 작은 조명도 큰 존재감으로 다가왔고 그 존재감들이 합쳐져 큰 덩어리를 이룬 듯이 느껴졌다.
아마 눈이 와서 더 극적인 모습을 완성되었던 것이겠지. 그 눈들에 비친 빛들이 더욱 몽롱하고 화려하도록 부각되어 보인다.
많은 인파 때문에 쌍둥이와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빠르게 눈을 움직여야 했지만, 동시에 카메라에 담는 시선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시간이 흘렀을까,
이 추위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점점 더 느껴지는 추위가 강해진다.
마켓에는 크리스마스 장식품 위주로 판매하고 있었지만, 사실 마켓은 음식이 하이라이트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있다.
드디어 어제부터 눈독 들이고 있었던 펀치 음료를 먹을 때가 온 것이다.
이 추운 겨울날 먹는 따뜻한 와인 한잔은 마치 노천탕에서 얼굴은 차갑고 몸은 따뜻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나는 겨울에도 살짝 방에서 한기가 느껴지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살짝의 한기에 이불속으로 폭 들어가 몸을 데우는 순간엔 고양이가 햇살 속에서 식빵을 굽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전기장판이면 더욱 좋고.
"펀치 하나 주세요"
알코올을 좋아하지 않은 내 쌍둥이 손에도 펀치 하나가 들렸다. 그리고 내 손에도 연이어 펀치가 들렸다.
따뜻한 음료의 온기가 장갑을 넘어서 느껴진다.
잠시 입을 댔다 뜨거운 김만 닿인 채 곧바로 입을 뗐다. 음료가 너무 뜨거운 탓이다.
하지만 이 추위에 펀치가 식는 것은 금방일 테니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입을 댔다.
상큼하지만 달달한 음료의 맛으로 짐작했었지만 아쉽게도 이곳에서 먹는 펀치는 내 짐작과는 조금 달랐다.
잠시 후 쌍둥이가 나에게 묻는다.
"이게 무슨 맛이야?"
"그냥 한약맛 같아.."
차라리 이게 따뜻한 물이라면 더 벌컥벌컥 마실텐데 우리 스타일이 아닌 음료를 오직 따뜻함에 의존하여 마시려니 생각만큼 잘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따뜻함이 조금이라도 없어질 새라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우리.
이내 마지막 일정을 위해 길을 나섰다.
우리가 찾은 재즈바는 예약제로 반갑게도 입장료는 없었다. 다만 노쇼를 지양해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기에 꼭 갈 수 있는 상황에 예약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이 마이너스 체력을 끌고도 이 곳에 도착한 이유 중 하나였다.
큰길에서 점차 좁은 길로 좁혀 들어가자 재즈바가 보인다. 입구에 들어가자 좁은 계단들이 우리를 지하로 인도하고 있었고, 잠시 후 직원이 나와 예약을 확인해 주었다.
안내받은 자리로 가자 독일에서 만난 언니가 벌써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언니! 빨리 오셨네요!”
“우리 하루 만에 봤는데 이렇게 반가울 일이야? 프라하에서 뭐 했어?”
약 하루하고도 반 정도 안 봤을 뿐인데 이곳저곳에서 쌓은 추억들을 나열하느라 바빴다.
언니는 양조장을 다녀왔고, 그곳에서의 기억이 너무 좋아 우리에게 추천해 주었지만 우리는 일정상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다음에도 프라하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며 좋아했다.
아, 우리도 술을 시켜야지.
칵테일 두 잔을 연달아 시킨 후 자리에 앉으니 큰일이다. 따뜻하고 어두운 게 노곤해지기 딱이다.
이미 나에게 남은 체력은 바닥인지라 확실히 버거운 자리이긴 했다. 그래도 마지막 체력을 끌어오기로 했다.
그렇게 밴드음악이 시작되자 잠시 후, 여름 파리에서부터 그토록 기다렸던 재즈바였지만 허무하게 잠들어버린 나였다.
겨우겨우 눈을 잠깐씩 뜨며 음악을 온몸으로 즐기는 척을 했지만 결국 또다시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며 이내 꿈속에서 재즈바를 즐길 수밖에 없었다.
공연 1부가 마치자 우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허겁지겁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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