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아저씨와 숙소 앞에서 멀뚱거리기만 30분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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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여행을 앞두고, 나는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두렵다고 말하긴 애매한데, 그렇다고 설레는 건 분명 아니었다. 명확한 이유 없이 떠나는 여행이란 언제나 그렇다. 어딘가 불안하고, 스스로가 낯설어진다.
영상이라도 찍자는 생각에 유튜브에서 발리 여행 브이로그를 몇 편 훑어보긴 했다. 예쁜 구도를 몇 개 저장했을 뿐, 뭘 보고 뭘 먹을지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은 어떤 방향도 목적도 없이, 그저 ‘그림처럼 예쁜 장면 하나쯤’ 남겨보자는 욕심에서 출발했다.
그래서였나. 출발 일주일 전부터, 이 여행은 마치 미션처럼 느껴졌다.
비행기 티켓을 다시 확인하고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하고, 그런 기분으로 짐을 쌌다. 그런데 그 타이밍에, 또 하나의 문제가 추가됐다.
“발리 전역 정전”
내가 도착하기 바로 하루 전날, 전기가 나갔고 에어컨, 냉장고, 와이파이 모두 작동 불가라는 이야기가 오픈채팅방에 계속 올라왔다. 카드 결제도 되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멍하니 휴대폰을 쥔 채 잠시 화면을 내려놓았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런 소식을 들으면서도 결국 나는 그 모든 혼란 속으로 스스로의 발로 조용히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짐을 꾸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진을 위해 야심 차게 고른 옷들이 생각보다 부피가 컸고, 배터리가 금방 닳는 핸드폰은 용량마저 없었다. 공기계를 하나 빌렸고, 미러리스 카메라까지 포함하면 총 세 대의 기기를 끌고 떠나는 일이 되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다시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했을 땐 마음보다 몸이 더 피로한 상태였다.
"사진은 많이 찍자."
무섭더라도, 나는 이미 떠나고 있고, 도착하면 어쨌든 뭘 하게 될 테니까.
토요일 오후의 인천공항은 의외로 한산했다.
면세점에 들를 겨를도 없이 탑승구를 찾아 걷고 있는데, 문득 ‘뭔가를 잊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SKT 유심 무상 교체라는 안내판.
출발하기 전주였나 SKT 유심 유출 사건이 터졌더랬다. 얼른 바꿨다. 공항이 아니면 바꾸기도 힘들었던 유심이었다.
탑승구 가까이에 있는 좌석에 앉아있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대부분은 누가 봐도 신혼여행이거나 친구들과의 단체 여행이었다. 나 혼자만, 정말 혼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게 마음 편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여행에 지쳐 있었고, 누군가를 배려하며 움직이는 일이 어느 순간엔 너무 피곤했으니까.
물론, 내가 좋아하는 친구랑 함께 왔다면 정말 재밌었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그냥, 온전히 나만을 위한 여행이어도 괜찮겠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비행기 자리는 미리 선점한 덕분에 비상구 근처 통로석이었다. 폐소공포증이 있는 내게 그건 말 그대로 구원 같은 자리였다. 옆자리 커플은 조용하고 다정했고, 그 덕분에 나도 처음부터 편안하게 앉을 수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밥을 잘 먹었고, 아이스크림도 맥주도 야무지게 챙겨 먹었다. 심지어 쌍둥이 자매가 5년 전부터 보라고 했던 영화 <나이브스 아웃>도 드디어 다 봤다. 추리 게임을 좋아하는 내게는 딱 맞는 영화였다. (인생 영화까진 아니었지만.)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꺼낸 편지지. 떠나기 전에 남자친구에게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이 여행을 영상과 편지로 남겨올게.”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시작이 이 비행기 안이었으면 했다.
그렇게 몇 줄을 적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어깨가 들썩이고 숨이 막힐 만큼의 울음이었다. 나도 왜 우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생각보다 이 여행을 무서워하고 있었구나 하는 감정이 또렷하게 올라왔다.
동시에 그래도 이렇게 혼자 비행기에 올라타고, 스스로 약속한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괜히 뿌듯하고, 또 안쓰러웠다. 나는 그 감정을 조용히 눌러 담아 편지지 위에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썼다.
발리 공항에 내리자마자, 공기부터 달랐다.
후끈하고 축축하고, ‘여기가 진짜 남쪽이구나’ 싶은 공기.
짐은 한참을 기다려야 나왔다. 붉은 불빛 아래, 컨베이어 벨트가 멈춰 있었고 직원이 안으로 들어가 뭔가를 고치는 모습까지 보였다. 초록불이 켜졌지만, 내 짐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늦겠다… 기사님 기다리실 텐데.’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가려는데, 내 앞을 막아선 건 ‘수수료 없는 ATM’
원래 현금을 많이 쓸 생각은 없었지만, 정전 소식이 떠오르자 불안감이 다시 올라왔다. 예산보다 더 많이 뽑아버렸고, 지폐가 손에 꽤 묵직했다.
그 무게가 이상하게 든든했다.
택시 기사님과는 다행히 연락이 잘 닿았다. 차에 타자마자, 벼락치기한 영어 실력을 총동원해 물었다.
“어제 발리 정전 어땠어요?”
그랬더니, 기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유심 없어요?”
“아니, 유심 말고 블랙아웃! 전기!”
나는 당황해서 한참을 더 설명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케이. 렛츠 고.”
그리고 도착한 곳은 유심 가게. 순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나 유심 있어요. 그냥 숙소로 가 주세요…”
말을 아껴야겠다.
숙소는 작은 골목 안에 있었다. 표지판도 잘 안 보였고, 리셉션도 없었고, 직원도 보이지 않았다.
응? 직원도?
내가 늦게 온다고 말을 했는데?
택시 기사님이 전화를 걸어줬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우리는 낯선 마당에 덩그러니 서 있었고, 내 이마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20분이 흘렀나, 번뜩 예약 사이트가 떠올랐고 한참 전에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너무 늦게 와서, 방에 키 꽂아놨어. 들어가서 쉬면 돼. 룸번호는 000이야.”
문제는 그 번호가 붙은 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새벽 3시 반, 택시 기사님과 함께 조용한 숙소를 돌며 방 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이 방인가? 아니야. 저 방인가? 아니야.
웃기지만, 정말 울고 싶었다.
첫날 밤부터 너무 낯설고, 너무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