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나를 만나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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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찾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숙소의 골목은 어두웠고, 표지판은 흐릿했고, 주소에 적힌 방 번호는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몇 개의 문 손잡이를 조심스레 당겨보려다, “아니면 안 되지 뭐” 하며 뒤로 물러나는 걸 반복했다.
마침내, 문을 찾았고 테라스 의자엔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자기 영역을 지키는 것처럼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순간 이상하게 ‘내가 낯선 땅에 들어가는 기분’이 확 밀려왔다. 자기 영역을 지키겠다는 듯, 나를 경계하는 눈빛.
하지만 돈을 낸 건 나였고, 결국 숙소 주인은 나였다. 내 날카로운 눈빛 한 방에 녀석은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고, 나는 가방을 끌고 문을 열었다. 택시 기사님 앞에서 이렇게까지 내 방 정보를 노출하고 싶진 않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새벽 3시에 낯선 나라에서 누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거듭 인사를 하고 그를 보내고, 드디어 방 안에 들어왔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4시 반.
세수를 하려고 욕실로 향했는데, 침대 아래에 개미가 기어 다녔다. 그걸 본 순간, 이 숙소와는 그다지 오래 정을 붙이지 못하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비행기에서 받은 생수로 얼굴을 대충 닦고, 이를 닦고, 가방을 정리한 뒤 침대에 누웠다. (발리는 발리밸리에 취약한 곳이라, 가능하면 입에 닿는 물은 생수를 이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침대에 누웠다. 그때서야 실감이 났다.
나, 진짜 혼자 발리에 왔구나. 말로 하면 쉬운데, 이게 꽤 기묘한 감정이었다. 출발 전엔 그냥 '여행'이라 생각했다. 영상도 찍어보고, 좀 쉬어보고, 뭐 그런 거. 근데 지금은 ‘완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라는 게 이렇게 다르게 다가오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생각.
내일 뭐 하지?
아무것도 계획해두지 않은 첫날 아침. 자유롭다기보단 조금 무서웠다. 시간이 너무 많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발리엔 요가가 유명하다니까, 요가라도 해볼까? 지도를 켜고 요가원을 찾았다. 현장 등록하려면 수업 시작 50분 전에 도착해야 한단다. 지금 시간 계산을 해보면, 나는 세 시간 안에 다시 일어나야 했다. 음… 가능할까?
[오전 9시]
못 일어났다. 솔직히 기대도 안 했으니까 기분은 괜찮았다.
'그냥, 그래 그럴 줄 알았지' 하는 헛웃음만.
무계획 속에 맞이한 아침. 무얼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길래, 그냥 카메라를 켜봤다. 브이로그 흉내라도 내보자 싶어서. 전날 바닥에서 기어 다니던 개미가 자꾸 떠올라서 몸도 괜히 간질간질했고, 이 숙소엔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짐을 정리하고, 체크아웃을 하고, 어디 식당이라도 가봐야지 싶었다.
그래도 계획을 세우고 있는 나 자신이 웃겼다 나는 계획 짜는 걸 좋아하지만 정작 짜면 스트레스받는 타입이다. 계획의 분위기는 좋아하는데, 결정 자체는 부담스러운 사람.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생각보다 술술 풀렸다. 이런 게 어른이 되는 건가.
화장을 하며 영상을 찍었는데, 30분 넘게 카메라 앞에서 떠들고 있었다. 얼굴도 반쯤 민낯인데, 하고 싶은 말은 왜 이렇게 많았는지. 결국 집에서 편집하려고 보니 너무 오글거려서 한 컷도 못 썼지만 그 영상은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가끔은 글보다 영상이, 생각을 더 진하게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니 날이 맑았다. 숙소 문 앞에서 처음으로 직원과 마주쳤다. 밝게 인사해 주는 얼굴에 괜히 이 숙소에 느꼈던 불만이 조금 녹았다. 아, 나 아직도 사람을 참 좋아하는구나. 나도 참 뻔하다.
내 무거운 캐리어를 보더니 맨발로 달려와 대신 들어주는 직원. 사실 그도 자기 일을 한 것뿐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작은 친절이 결국 누군가의 여행을 기억에 남게 만든다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당연하다고 넘기지 않으려 한다.
짐을 맡기고 나와 발리의 성수동이라 불리는 근처 카페로 향했다. 카페로 가는 길을 막상 걸어보니 발리는 발리였다. 좁은 도로, 오토바이, 사람과 차가 뒤섞인 거리. 클락션 소리가 끊이지 않는 와중에 나는 걷는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시종일관 누군가와 눈치를 봐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카페.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실내는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대부분의 손님은 서양인이었다. 호주에서 가까워서 그런가, 말 그대로 '바캉스를 즐기는 사람들' 같았다. 나는 혼자, 안쪽 자리에 앉았다. 리뷰에서 봤던 드래곤볼 스무디와 브렉퍼스트 머핀을 주문했다. 도전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일단은 ‘발리니까’라는 마음으로.
음식이 나왔고, 스무디는 보라색이었다. 잠깐 주저하다가 한입. 오. 맛있다. 과일 스무디였구나. 색깔이 낯설어서 겁먹었는데, 괜히 쫄았다.
그다음은 머핀. 조심스럽게 한 입 …… 뭔가 이상한 향. 이건 뭐지? 설마 오이…?
그렇다. 머핀 안에 오이가 들어 있었다. 나는 자타공인 오이 감별사인데, 또 당했다. 그리고 알고 보니, 발리에서는 의외의 음식에 오이가 자주 들어갔다. 아무튼 결국 반도 못 먹고, 배는 고프고, 오이향은 입 안에 남았고, 기분이 묘했다.
숙소에 돌아와 짐을 찾고, 다음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처음으로 그랩을 불렀다. 괜히 겁을 먹었지만, 생각보다 간단했다. 이런 것도 해보면 별거 없다.
이번 숙소는 기대가 컸다. 쌍둥이 언니가 1년 전에 다녀간 곳. 그때 영상통화로 봤던 수영장이 이젠 내가 도착하는 장소가 되었다. 정글처럼 울창한 길을 따라 주황색 택시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택시는 후덥지근한 공기를 뚫고 정글 같은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설마 이 길 따라 숙소가 있긴 한 걸까” 의심이 들 무렵, 진짜 숙소가 나타났다.
나를 기다리는 숙소가 나타났다. 맨발로 맞이하는 직원. 아무도 없는 정글 뷰, 정확히 내가 상상했던 발리. 그 밝은 얼굴이 이상하게 마음을 놓이게 했다. 얼리 체크인을 부탁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물론이죠”라고 대답해줬다.
방은 깨끗했고, 시원했고, 무엇보다 냉장고가 있었다. 나는 기쁘게 침대에 주저앉았다. 웰컴 주스를 건네며 직원이 말했다.
“문은 꼭 닫아두세요. 여긴 정글이라 원숭이가 들어올 수도 있어요.”
나는 동물을 무서워한다. 그래서 몽키포레스트도 애초에 계획에서 제외했다. 이제 나의 바람은 단 하나. 제발 이 멋진 숙소에서 원숭이를 만나지 않기를.
숙소에 들어와 오픈채팅방을 보니 딱 내가 있는 지역에서 약속을 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녁 식사 약속 하나, 바로 확정. 그전에 수영하고, 마사지까지. 이 정도면 발리 초반치고는 훌륭하다.
수영장 쪽을 내려다보니 선베드에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처음엔 그냥 스쳐봤는데, 10분 후에도, 20분 후에도, 그대로였다. 책을 읽고 있었다. 땡볕에서.
왜지? 왜 여기서 책을?
낭만이라기엔 너무 덥고, 여유라기엔 너무 강렬한 햇볕. 서양인들의 뇌 구조는 다르다는 말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순간이었다. 문득, 나는 저 두 사람 앞에서 혼자 카메라를 세우고 수영을 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