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발리는 혼자 와도 될 것 같아요

결국 함께 하는 사람이 중요한 거였어

by 오운


나는 혼자 오려고 했던 게 아니다.


원래부터 혼자 오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발리는 혼자 온 여행자들이 많은 곳이다. 요가를 하러 오는 사람도 있고, 노트북 들고 와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서핑 하나 하려고 한 달을 통째로 비워두는 사람도 있다. 각자 하고 싶은 게 분명한 여행지. 그래서 혼자 오는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곳. 취향과 필요를 따라온 이들에겐 이 섬이 익숙하고, 혼자라는 말은 특별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다.





그럼 나는? 나는 무엇 때문에 혼자 왔을까?


솔직히 말하면, 우연히 혼자 왔다. 그저 어쩌다 혼자 오게 되었다. 혼자올 생각도 없이 혼자 왔다. 누가 등을 떠밀듯 이곳까지 밀려온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이 여행에서 성취해야 할 무언가도, 애초에 없었다. 어딜 가야 한다는 조바심도, 뭘 남겨야 한다는 강박도. 그러니까 오히려 평온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실망할 일이 없어서. 그런 마음으로 여행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되는 여정은 생각보다 오래 잊고 있었던 감정이었다. 바라지 않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평온.


----


나는 혼자 있는 걸 힘들어하던 사람이었다. 남의 시선을 과하게 의식하던 시절이 있었고, 누군가 내 모습을 쳐다보는 것 같으면 그 시선에 괜히 작아졌다. 그런데 스무 살 무렵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바뀌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꼭 외로움만은 아니라는 걸, 오히려 꽤 야무지게 잘 즐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발리에서도 나는 ‘혼자서 잘 놀아요’를 실행해 보기로 했다.
그 첫 주자는, 수영이었다.





지금 숙소 수영장엔 두 명의 외국인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이 공간으로 들어가도 될까? 그들의 평화를 깨는 건 아닐까? 물소리도 조용한 그 분위기 속에 내가 들어가도 될까, 잠시 망설였다.


우선, 하나 남은 선베드에 비치타올을 깔았다. 그리고 선베드 옆 작은 테이블 위엔 방에서 가져온 맥주 한 캔과 삼각대를 올려놓았다. 앗, 옆에 있는 외국인과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물로 향했다.


허겁지겁 들어간 수영장은 생각보다 깊었다. 까치발을 겨우 들어야 얼굴이 물 밖으로 나오는 정도. 차가운 물 온도는 신경 쓸 새도 없었다. 사진도 찍기 전에 허우적대느라, 원래 의도했던 ‘고요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잠시 후, 그들이 자리를 떴다. 오히려 그들은 나의 평화를 지켜주려는 듯 자연스럽게.

아 모르겠다! 이제는 진짜, 풍덩 빠져보는 거다.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초록빛 여름이 좋다고.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막연한 이미지 같았는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초록빛 여름은, 자연이 가득한 곳에서 할 일 없이 멍하니 있는 시간. 가끔 흐린 하늘, 젖은 잎사귀에 맺힌 이슬, 기분 좋은 바람. 그리고 그런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


아마 내 초록빛 여름은 이 발리 수영장에서 시작된 것 같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속에서 혼자 물장구를 치고, 핸드폰을 꺼내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이 풍경을 보여주고, 잠깐 웃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나에게 초록은 그런 것이다. 덧없이 아끼는 마음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것. 초록빛 여름을 즐기기 위해 필요한 건 다정한 풍경이 아니라, 마음이 다정해지는 순간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


수영을 마치고 나니 시간이 훅 지나 있었다. 조용했던 물 위에서 막 몸을 일으켰을 뿐인데, 어느새 허겁지겁 방으로 올라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샤워를 대충 마치고 예약해 둔 마사지샵으로 가기 위해 오토바이를 불렀다. 마음은 조금 급했지만, 정글 사이를 가르는 그 길은 내 마음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눈앞의 풍경은 사진으로도 담기지 않을 만큼 멋졌다. 다행이다. 아직 이 길을, 이틀 정도는 더 지나갈 수 있다는 게. 시내로 나갈 때마다 그 코스를 지나칠 때면 눈을 더 반짝이게 된 이틀이었다.


예약했던 마사지샵에 도착하니, 환한 미소로 반겨주는 직원들. 조용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부드럽게 뭉친 근육들이 풀리는 시간을 상상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이게… 맞나? 진짜? 피부는 오일로 매끄러워졌지만 근육은 매 순간 부서지고 있었고, 몸의 이곳저곳에서 작은 비명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만 약하게 해달라고 말했지만 말은 전해지지 않았는지, 힘의 강도는 그대로였다. 몸이 미끄럽고, 기분도 좀 그렇고, 그대로 샤워라도 하고 싶었지만 낮에 구해둔 동행과의 약속이 머릿속에 걸렸다.


결국 오일을 바른 채 어정쩡한 기분으로 샵을 나섰다. 마사지 하나로 이렇게까지 혼쭐이 나보긴 처음이었다. 덕분에 다음 마사지까지 약간의 트라우마가 생겨버렸다는 이야기..





그 후에도 일이 순탄하진 않았다. 오토바이 기사님과 위치가 잘 맞지 않아 좀 헤맸고, 겨우 기사님을 만나 탑승한 뒤엔 또 허겁지겁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동행은 총 두 명. 나보다 먼저 만나 카페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괜히 걱정됐다. 나만 어색하진 않을까. 내가 조금 늦게 들어가면 이미 어느 정도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진 않을까. 낯설고 낯선, 하지만 기대도 조금 섞인 마음으로 식당 앞에 도착했다.


"혹시 ㅇㅇ(오픈채팅 프로필명)님?"

"아, 안녕하세요! ㅇㅇㅇ님 맞으시죠?"


조금 어색했던 첫마디는 금방 웃음으로 바뀌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데 신기하게도 어색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름을 교환한 후에는 서로를 장난스럽게 놀릴 정도로 분위기가 빨리 풀렸다. 서로의 직업도 몰랐고, 나이도 모르고, 이름조차 잠깐은 기억이 헷갈렸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지금 이렇게 혼자 여행 중인 이유와 배경들을 나누는 데에 집중했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상이 들어있었다.


세상은 정말 넓고, 내가 모르는 삶은 너무 많았다. 발리에 혼자 왔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나름 꽤 용감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세상에는 훨씬 더 자기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가볍지 않았고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경로로 자기만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마주한 나는 조용히 마음이 뜨거워졌다. 아직도 내 인생에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이 남아있구나 싶었다. 큰 설렘이었다.




1층에서 식사를 마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위스키를 주문하는 동행들을 보며 나는 그냥 칵테일 한 잔을 시켰다. 아직 위스키는 잘 모른다. 맛도, 매력도, 솔직히 아직은 딱히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그저 웃으며 “저는 아직 맛을 몰라서요” 하고 얼버무렸다. 물론, 정말 맛을 모르는 것도 맞지만 정작 내가 위스키를 시작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다. 맛을 알게 되는 순간 분명 술에 쓰는 돈이 늘어날 게 뻔했고, 몸에도 그리 좋지 않은 걸 괜히 취향처럼 들고 살게 될까 봐. 나에게 위스키는 애써 시작하지 않은 작은 사치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앞으로 언젠가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직, 모른다는 말로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2차. 그때까진 몰랐다. 내가 이들과 유난히 잘 맞는 동행들이라는 걸 (이틀 후, 다른 동행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1차에서 나와 조금 걷는데, 한국에서부터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라이브 펍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순간, 안에서 뮤지컬〈맘마미아〉의 ‘Dancing Queen’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그 노래였다. 참고로, 나는 이 뮤지컬을 계기로 콘텐츠를 전공하게 됐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곡이다. 어떤 감정의 시작점이었던 그 곡.


그 순간, 정말 말 그대로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가 없어 다른 외국인들과 합석을 해야 했다. 그 테이블에서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여자 외국인 두 명이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연기 사이로 흐르던 낯선 음악과 웃음소리, 그리고 내 자리에 앉아 있던 조금은 낯선 나. 그 속에서, 어쩌면 또 다른 인연 하나가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발리에 왔다면 한 번쯤 계획을 놔버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