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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비 Mar 14. 2017

비로소 봄이야.

제주 남서쪽 작은마을에도 봄이 내렸다.

느리지만 나태하지 않고, 조용하지만 적막하지 않고, 단순하지만 단조롭지 않고, 재미있지만 시끄럽지 않고, 철학적이지만 어렵지 않은 삶을 위하여





제주,
남서쪽 작은 마을,
맨도롱또똣에도 봄이.

바람 소리 요란하고 날카롭게 살을 파고들던 겨울을 지나, 봄이 내렸어.

어느 날, 섬의 동쪽에서 반가운 봄 손님이 찾아왔어.
이제 추위를 피해 불 지핀 거실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기보단,
따뜻한 오후 햇살을 맞으며 데크에 앉아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며 알 수 있었어.

비로소 봄이 왔음을.



 겨우내 피고 지던 창고 지붕 위 오래된 동백나무의 동백들은 어느 때보다도 가장 빠알갛게 익어있었어. 곧 져야 할 때임을 알고 있다는 듯이. 비로소 봄이 왔으니까-



봄 손님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따뜻하지만 싱긋 한 오후의 봄볕이 남아있었어.
비로소 봄이야.




초록의 잔디가 봄볕을 듬뿍 받고 힘을 내어 어서 올라오도록 물을 뿌려주어야겠다.
비로소 봄이야! 촤아아-





어느 봄날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창으로 들어오는 봄볕을 흠뻑 맞으며 나들이를 다녀와야지.
그런 순간에는 전기뱀장어의 노래가 좋겠어. 봄, 혼자만의 버스여행객이 되는 그런 순간에 말이야.

비로소 봄이야.




 봄의 버스여행객이 되어 찾아간 곳은 아끼는 바다야.
아끼지만 내 것이 될 수는 없는 그런 바다.
이 계절, 이 즈음의 시간에 찾으면 비로소 내 것처럼 안길 수 있는 그런 바다야.
여름이 되고,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가지 않는 게 좋아. 지금의 바다와는 많이 다르거든.




어느 날, 오일장이 열렸길래 얼른 달려가서 튤립을 잔뜩 사 왔어.
봄이 오면, 비로소 봄이 오면 마당 한편에 쪼로록 심어두고 싶었거든.
아직 꽃대가 올라오지 않은 튤립들을 쪼로록 심어두고, 매일매일 물을 주고, 돌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 꽃대가 올라오고, 꽃이 피어나는 그 순간을 지켜보고 싶었거든.

비로소 봄이야.





예전에 주워다 두었던 오래된 나무 찬장의 자그만 유리문이 두 개 있었어.
끼워진 유리가 울퉁불퉁한 것이 특이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해서 딱히 무얼 할지도 정하지 않은 채 그저 한구석에 놓아두었었지.
그러다 봄이 되니까 말이야, 그 자그만 유리문으로 액자를 만들어 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예전에 꺾어서 커다란 사진집에 넣어 말려두었던 고사리를 하나 꺼내 고사리 액자를 만들었어.
그리고 안채 한 쪽 구석에 걸어주었더니, "여기가 원래부터 내 자리요!" 하는 거 있지.

비로소 봄인 거야.




 어느 일요일이었어.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지난여름에 만들어두었던 바질 페스토를 탈탈 털어서 파스타를 만들어 먹기로 했어. 마침 집에 잘 익은 아보카도가 있어서 말이야. 아보카도를 넣은 샐러드도 조금 만들고, 살사소스도 만들어 먹기로 했어.
 볕이 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우리 마당에서 먹을까?" 했지. 마당에 J가 만들어둔 자그만 나무 테이블 위에 상을 차렸어. 얼마 남지 않은 J 생일에 마시려고 사두었던 와인을 결국 이 날 따고 말았어. 왠지 와인이 빠지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거든.

비로소 봄이야.




재작년 가을엔가 만들었던 작은 화덕이 있어. 흙으로 만든 화덕인데 그 위에 얇게 석고를 바르고, J가 예쁘게 그림을 그렸어. 종종 사람들과 피자도 구워 먹고, 고구마도 구워 먹고 그랬지.
J는 이제 이 녀석을 부수고, 새로 더 크게 화덕을 만들겠다고 구상 중이야. 그런데 나는 왠지 너무 아쉬운 거야. 저기 아래 기초로 쌓은 돌 틈 사이로 자란 풀들이 화덕이랑 너무 잘 어울리더라고.

비로소 봄이야.




 오늘은 볕은 정말 좋은데, 바람이 정말 미친년 머리 휘날리듯이 불었어.
마당에 널어두었던 빨래를 걷고 있는데, 옆집 할망도 빨래를 걷느라고 마당에 나와계셨어.
"바람이 정말 많이 부네요!" 인사를 건넸더니, 할망이 마당에 잔뜩 열린 금귤을 좀 먹을 테냐고 물어봤어. 냉큼 "네!!" 하고 대답했지.
소쿠리 하나를 가져다 하나 둘 따서 담으시다가,
"아유! 추워서 더 못 따겠다. 먹고 맛있으면 와서 알아서 타다가 먹어" 하셨어.
얼른 하나 물에 씻어 먹어보니, 새콤달콤상콤 아주 맛이 좋았어. 바람이 좀 멎으면 더 따다가 금귤청을 담가야겠다. 너무 셔서 못 먹는다는 할망도 하나 드리고, 여름에 차가운 탄산수에 타서 마셔야지.

비로소 봄이야.













http://blog.naver.com/dab_e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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