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보일 May 03. 2020

원고지가 17장일 때

코로나 19로 현타 오지게 온 날, 뜨거웠던 내가 떠오르다니


견우와 직녀는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해 오작교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만약 견우와 직녀가 서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오작교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들어진다 해도 견우와 직녀에겐 고통일 뿐이다. 나는 그 원치 않는 오작교였던 셈이다. 엄마의 뱃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손에 탯줄을 감고 놓질 않았다. 어쩌면 이 세상에 나오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199*년 3월 *일 오전 7시 30분경, 나는 비쩍 마른 모습으로 나의 ‘첫 번째 고향’을 떠났다.

나는 참 유별나게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엄마 등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죽을 듯이 울고, 낯선 사람의 목소리만 들려도 울었다. 엄마는 한동안 집 밖을 나갈 수 없었고, 모두가 잠든 조용한 바에야 조심히 나를 업고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 이것은 내 하얀 피부 비결 중 하나일 것이다. 피부도 피부지만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은 거의 노란빛을 띠는 갈색이었고, 짙은 쌍꺼풀의 큰 눈은 국적이 의심될 만했다. 그래서인지, 지금 들으면 민망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백설공주’라 불렀다. 하지만 동화 속의 상냥하고 얌전한 그와는 달리 나는 새침데기에 개구쟁이였다. 엄마 외의 다른 사람과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고, 예쁘다고 손을 잡으면 휙 하고 뿌리치고 말았다. 비로소 집으로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고, 장난을 쳤다.

옛 집은 창호지가 있는 창문이었는데, 손가락에 침을 묻혀 구멍을 뽕뽕 뚫는 것은 나의 특기였다. 구멍을 뚫고 나면 엄마가 색종이를 예쁘게 잘라 붙여주는 것이 즐거웠다. 나는 집안에서 계속 구멍을 뚫고, 엄마는 집 밖에서 계속 구멍을 막는 것은 어린 내게 하나의 놀이였다. 창호지 뚫기가 질려갈 때쯤 나는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이 생겼다. 하루는 전화선을 잘라놓고 다시 테이프로 붙여 놓았는데, 혼을 내는 엄마 앞에서 전화선이 잘려도 전화가 되는지 궁금했다고 둘러대서 엄마가 한참을 웃었다고 한다.


다행히 나의 호기심은  이상의 살림살이를 망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대상은 ‘글자였는데, 스스로 한글 교육 비디오를 틀다 손이 기계에  정도였다. 엄마 손을 잡고 시내 나들이를 가면, 눈에 보이는 모든 간판들의 글자들을 물어봐 피곤할 정도였다. 결국 나는 6살이 되어서 한글을 뗐다.

그렇게 집안의 유일한 공주로 남을  알았지만,  기대는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엄마 배가 어느 날부터 서서히 불러오더니  몸은 질투로 점점 말라갔다.  머릿속에 누나라든지, 양보의 개념이 있을  만무했다. 지금은 너무 아깝고 사랑스러운 ( 부분은 조금 수정이 필요하다) 동생이지만, 그땐 오직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뺏어간 얄궂은 존재일 뿐이었다. 질투에 눈이  나는 동생을 감싸 놓은 이불을 들어서 내가 덮거나 모른  동생을 지르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그보다 더했던  길을 가다 쓰레기통을 보고 동생을 버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라고는 엄마와 동생이 전부였던  좁은 내게 학교는 정글이었다. 그리고 나는 예정이나   왕따가 되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유치하지만, 나의 이국적인 외모를 가리켜 ‘미국인이라 놀리며 놀아주지 않았다. 덕분에 엄마는 학교에서 돌아와 매일같이 우는 딸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낯설고 어려운 것뿐이던 학교에서  하나 내가 지신 있던 것은 받아쓰기였다.  자신만만하던 내가 실수로  개를 틀리고, 나는 엄마에게 생애  번째로 매를 맞았다. 어떻게 우리말을 틀릴  있냐며 혼내던 엄마 앞에서 나는 울며 다시는 틀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게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한 계기일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꾸준히 일기를 썼는데, 귀찮을 때면 짤막한 동시를 지어갔다. 그걸 보신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를 백일장에 내보내셨다. 아무것도 모른  일기장에 쓰던 시를 대충 쓰고 내었는데, 우연인지 실력인지 가작상을 받았다. 이후 나는 한참 동안 일기에 동시를 쓰지 않았다. 귀찮은 글짓기 대회에 가기 싫어서였다. 하지만  글쓰기가 이제 겨우 시작이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 끝날 줄도 몰랐지.)

어느새 집보다 학교가 즐거워진 내게 집은 지옥이었다. 매일 같이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빠와 울며 소리치는 엄마.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새근거리며 자는 동생의 삼박자가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불속에서 울음을 삼키며 잠든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결국 엄마와 아빠는 이별을 택했다. (내가 엄마 보고 이별하라고 했다. 아빠가 싫다는 것보단 세상 하나뿐인  친구가 힘들어하는 느낌이었을까.) 엄마는 한참을 길을 찾지 못했다. 술에 취해, 슬픔에 취해 비틀거렸다. 마땅히 13살의 나는 울어야 했지만 그럴  없었다. 나마저 약해지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학교에서, 집에서 항상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중학교에 진학하며 나는 우연히 글을 다시 쓰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우연은 아니고, 백일장에 나가고 싶다고 내가 국어 선생님께 말했던  같다. 역시 운명의 장난은  손으로 하는 거다.) 글을 쓰며 나는 울분을 토했던  같다. 눈물 젖은 축축한  글들은 빛을 발했다. 도지사 표창까지 받았으면  다한 거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고 블로그에도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랬다.

학교에선 모든  잊어버린  공부했다. 자연스레 성적이 좋았고 친구들과 선생님은 나를 치켜세워줬다. 생애 처음  노력으로 이뤄낸 성과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마치 더위 속에서 금방 뚜껑을 열고 마시는 시원한 사이다같이 시원하고 짜릿했다. 그렇지만 이제  정신을 차리고 분주하게 살아가던 엄마에게 진심 어린 칭찬 한마디를 듣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사이 나는 더욱 갈증에 허덕였고, 그럴수록 사이다는  달고 시원했다.

맙소사. 고등학교엔 나보다  목마른 아이들도, 사이다보다  좋은 것을 마시던 아이들이 많았다. 내가 제일이라 여기던 오만한 생각이 허물어지는 순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겨났다. 공부로도, 글쓰기로도 내게 돌아오는 것은  빠진 단물뿐이었다. 그동안 해오던 얼렁뚱땅들로는 사이다를 마실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아직도 사이다를 좋아하지만, 이제 사이다가 목표는 아니다.  대신 나를 이끄는  생겼다. 원치 않는 오작교든, 말괄량이 백설공주든, 질투쟁이 누나든, 사이다 중독자든.  어떤 모습에도 흔들리지 않는 꿈이 생겼다. (꿈은 원래 내가 흔들지 않는다는    몰랐다.) 엄마를 비롯한 어른들이 걱정하는, 세상 물정 몰라 꾸는 꿈이 있다. 끝에는 내가  꿈을 좇지 않게 되더라도, 원고지  장으로 정리되는 나의 17 인생에 힘이 되고 소중하다. 앞으로  장을  적게 될지 모르지만, 끝이 아닌  분명하다.



그리고 결국 끝이 났었다. 내게 온 세상인 엄마가 글을 그만두지 않으면 연을 끊자고 했다. 나는 글이 아닌 내 목숨을 끊고 싶었지만 다들 잘 알다시피 죽는다는 건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나는 기나긴 후회의 길로 들어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