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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보일 Feb 10. 2022

가난이 미치도록 싫은 너에게

그날의 감정 - 희망

가난이 미치도록 싫은 너에게


  안녕, 나는 너야. 남들이 네 나이를 들으면 '시집가야겠네'를 연발해. 너는 속으로 곧장 욕을 하지. 내가 결혼하면 냉장고라도 하나 사줄 거냐고 말이야. 아주 화가 나서는 시집가지 말까도 생각하지만 사랑하는 남자 친구의 얼굴이 어른거릴 거야. 결국에 네가 할 수 있던 건 애매하게 웃어 보이는 것뿐이지. 짤랑이는 통장 잔고가 참 미워. 임대아파트에 사는 게 부끄러워서 한참을 돌아 집에 가고, 10% 할인을 받으려고 카톡 채널을 추가하는 너도 한심할 거야. 그렇게 결국 또 너는 가난을 탓해.


  나도 알아. 가난한 건 정말 질색이야. 부모님을 부끄러워하게 하고, 친구들에게 밥 한 끼 대접하는 것도 너무 어렵게 만들거든. 너를 위해서 하는 모든 일은 돈이 아깝고,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 되어버리지. (어렸을 땐 서른 쯤엔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넓은 마당이 있는 집에 살 줄 알았던 열두 살의 네게 미안할 만큼 작은 꿈이지.) 근데 아마 제일 싫은 건 말이야.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다는 거야. 친구가 찬 명품 목걸이의 가격을 찾아보고 절망하는 내가 싫고, 단팥빵을 고르다가도 맛있어서 사는 건지 싸서 사는 건지 고민하는 내가 싫어. 내가 가난한 건지, 가난이 나인 건지 몰라서 그냥 이제는 이런 내가 싫은 거야.




<그 해 우리는> 6화
웅: 생활비 벌면서 장학금도 안 놓치고 죽어라 공부하고 열심히 산 거 내가 다 봤으니까 좀 더 큰 성공에 대한 꿈이 있을 줄 알았지.

연수 내레이션: 평범하게 남들만큼만 사는 거 그게 내 꿈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연수: 그게 나한텐 성공이야.


 그런데 얼마 전에 본 드라마에서 네 처지랑 아주 꼭 닮은 주인공이 나왔지. 넌 그 아이의 서사가 드러날 때마다 눈물을 괄괄 흘렸어. 아득바득 어른처럼 살던 네가 어린아이처럼 앙앙 울어대는 게 참 가슴이 아팠어. 가만히 있으면 네가 그대로 눈물에 잠겨버릴 것 같아서 말해주고 싶어.




우리는 상황이 정말로 끔찍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이 우리가 원하는 기대와 기준에 못 미치기 때문에 괴롭거나 우울해지는 것이다. - 책 <소소한 즐거움> 중 '너그러운 비관주의'에서


  남자 친구랑 전시회를 갔다가 '헤테로토피아'라는 말을 알게 됐지? 그땐 그냥 멋져서 적어뒀는데. 헤테로토피아는 '다른 장소'라는 뜻 이래.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면 헤테로토피아는 어디엔가 있다는 거래. (네 성격에 뭔 개소리를 하나 싶겠지만 참고 들어줘.) 일상을 아주 조금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공간들인 거야. 차가 없어서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나서야 만난 멋진 바다가 그렇고, 멋진 들판이 있는 줄 알고 내려서 깔깔거렸던 허허벌판이 그렇지. 네가 '이거 참 이상한 글이군'이라고 생각하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주방도 그래.


  네게 유토피아를 줄 순 없지만 나는 조금 더 노력할 거야. 네가 현실적이고도 당연하지 않은 헤테로토피아를 찾아줄 거야. 가끔은 월급이 들어오면 내 옷을 사러 상점가를 거닐고,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도 떠날 거야. 모두가 잠든 이 밤에 너는 계속 글을 쓸 수 있어!

 



    너는 장작이고 가난이 불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반대야. 너는 가난이라는 장작을 태워서 열심히 큰 불이 되어가고 있어. 공부도 일도 인간관계도 모두 너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너의 모든 허우적거림이 보들보들한 파자마가 되고 찌개가 되고 임대아파트 보증금이 됐어. 언젠가는 네가 가난을 미치도록 싫어했던 너도 잘 보듬어주면 좋겠어.


악몽 꾸지 말고 잘 자!


2022년 2월 10일

가난이 미치도록 싫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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