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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보일 Feb 12. 2022

나와의 약속을 미루고 다른 사람을 만난 너에게

그날의 감정 - 서운함

나와의 약속을 미루고 다른 사람을 만난 에게


  안녕, 나는 너의 친구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르게 생긴 우리가 어떤 계기로 친해졌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 그렇지만 차가운 겉모습과 다르게 여리고 따뜻한 네 모습이 참 귀여워서 좋았던 건 기억나. 그런 네 얼굴을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네가 정말 실존하는지 체감이 잘 안 가. 말 같잖은 농담이야.


  너와 내가 각자의 길에 들어서서 열심히 달리느라 만남도, 연락도 점차 뜸해졌지. 그럼에도 종종 내게 관심을 보여주는 네게 '아, 너의 비좁은 삶에 그래도 내가 있구나'하는 약간 우쭐하는 마음도 있었어. 그리고 나의 비좁은 삶에는 네가 가끔 없기도 했다는 걸 미안해했어. 이번에도 네가 내게 연락을 줬어.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나를 친구라고, 밥 한 끼 먹자고 말이야. (물론 만남의 빈도가 우정의 깊이는 아니란 걸 알지만!) 나는 또 우쭐하고 또 미안했지. 근데 기뻤어.




  나는 모든 사람에게 늘 일정한 마음의 거리를 둬. 너무 가까이 뒀다가 뜨거워서 데고, 너무 멀리하다가 혼자 꽁꽁 얼기도 했거든. 그래서 절대 사람에게 너무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이랑은 다르게 너를 만나려는 내 마음은 동동 떠다녔어. 오랜만의 외출에 옷도 고르고 나름의 핫플레이스도 찾아뒀지.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약속 하루 전 네 전화를 받았어.


  약속이 미뤄졌어. 너는 그저 하루 이틀 뒤에 보면 안 되겠느냐고 했고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어. 약속이 미뤄지는 건 흔한 일이니까. 그러고 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서 너의 다른 친구들과 거나한 술자리를 하는 모습을 봤어. 네가 내일 나를 만나지 못하는 건 다른 이유일 수도 있는데, 어쩐지 알량한 자존심이 목 끝에서 울렁거렸어. '나도 바빠!'하고 말이야. 왜 그랬는지는 그때는 몰랐어.


  그러고 이틀 뒤 재약속의 날에 너는 또 전화했어. 그리고 또 약속이 미뤄졌지. 아니 정확히는 취소됐어. 다른 친구와의 일정이 그날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화가 났거든. 왜 또 나야? 나는 2주나 미뤄진 약속인데. 널 만나기 싫었어. 그러고 나는 '언젠가'를 기약하고 등을 돌렸어. 늘 하던 것처럼 너와의 거리를 더 늘리기로 했지. 근데 어쩐지 너무 슬픈 거야. 처음엔 네 탓을 하다가 화살을 내게 돌렸어. 나는 왜 이렇게 쿨하지 못할까.


  서운했어. 화가 난 것도, 네가 미운 것도 아니고 그저 네게 서운했던 거야. 나는 생각보다 너를 가까이 두고 있었어. 나도 모르는 새 네가 나의 우선순위 안에 있었어. 그랬는데 너에게 나는 '나중'이 된다는 게 서운했어. (연인 관계도 아닌데 말이지.) 내가 너보다 일을 가까이 뒀던 것처럼 너도 어떤 무언가가 더 가까웠을 거라 생각해. 일주일 전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나만큼의 거리를 기대했나 봐.




  그날이 지나고 너는 다시 약속을 잡았어. 이런 내 옹졸한 마음도 모른 채 나를 만나러 오는 네게 서운해하는 내가 너무 부끄러워. 그래서 이제는 우쭐하지도 미안하지도 않으려고 해. 네가 생각날 때 문득 갑자기 연락할 거고, 내가 바쁘면 가끔 너를 잊기도 할 거야. 너에게도 그게 당연하다는 것도 받아들일 거야. (나는 바보라서 금방 실천하진 못할 거야.)


  우리 맛있는 거 먹고 떠들고 웃자!


2022년 2월 12일

너와의 약속을 기다리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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