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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보일 Feb 20. 2022

내가 계속 글을 쓸 줄 아셨던 당신께

그날의 감정 - 고마움


내가 계속 글을   아셨던 당신


  안녕하세요, 저는 선생님의 고등학교 제자예요. 저는 아직도 선생님이 아주 좋은 선생님이었다고 기억되진 않아요. 늘 무표정한 얼굴로 철학적인 말씀을 늘어놓던 선생님의 수업은 정말 재미없었어요.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선생님 수업 때 자기 할 일을 했어요. 그래도 선생님이 싫지는 않았어요. 싫어할 이유는 없었거든요.


  그런데 친구들은 선생님을 더 싫어하게 됐어요. 바쁜 와중에 입시와는 상관없는 수행평가를 내어주셨거든요. '원고지 5장 이상의 자서전을 써와라'. 다른 친구들은 단원평가나 시조를 외우는 게 수행평가였던 게 낫다며 울상이었어요. 저는 어쩐지 어색한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어요. 왜인지 저도 모르게 설렜어요. 그냥 제가 글을 꽤나 쓰는 편이라고 생각했고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해서 그랬던 거라고 가늠했죠.


  쓰는 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불쌍한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회상만으로도 바들바들 떨리던 어린 시절로 시작했어요. 쓰다 보니 글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오더라고요. 이러면 안 됐어요. 저한테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는 게 죄라서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거짓말을 하는 중이었거든요. 근데 원고지 위에서는 거짓말을 하기가 싫었어요. 선생님도 보셨겠죠? 저는 그렇게 엄마도, 친구들도, 다른 선생님들도 모르게 글을 계속 쓰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하룻밤만에 원고지 17장을 써냈어요. 사실 더 쓸 수 있었는데 17살 인생이 17장에 담긴 게 꽤나 멋졌어요. 그래서 제목도 17장짜리 인생 어쩌고였던 것 같아요. 제 손에서 원고지가 떠나는 순간 다 잊었어요. 그걸 내고는 다시 변호사가 장래희망이 되었죠. 모의고사 성적이 나오고 절망하고 있을 무렵 선생님께서 절 불렀어요. 그때 선생님께서 원고지를 돌려주셨어요.


  "원래 돌려주면 안 되는 건데, 언젠가 네게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서."


  수업시간이 아닐 때 선생님께서 그렇게 길게 말씀하신 건 처음 봐서 놀랐고요. 왜 나만 돌려주지 하고 놀랐어요. 선생님 말도 이해가 안 가서 그냥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어요. 그래도 뭔가 의미가 있나 보다 하고 갖고 있었어요.


  이후에 전 국어국문학과도 아니고 문예창작과도 아닌 밥 벌어먹기 위한 대학에 진학했어요. 짐 정리를 하며 그 원고지를 다시 읽고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선생님을 원망했어요. 글을 쓰고 싶다는 제 마음을 선생님께 영영 맡겼으면 했거든요. 그래도 또 원고지는 안 버렸어요. 그리고 변호사도 작가도 아닌 제가 다시 그 글을 읽었을 땐 피식 웃었어요. 17살의 내가 참 허무맹랑했구나. 엉망인 꿈에 동조해준 선생님이 참 대단하다고도 생각했어요. 그랬어요.


출처 - 유 퀴즈 온 더 블록 유튜브


  얼마 전에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란 프로그램을 보다가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선생님이 입고 계시던 생활한복이었어요. 출연자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꿈은 '이뤄가는' 거라고.


  선생님은 알고 계셨나 봐요. 저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어요. 저는 글을 완전 놓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아직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 메모하고, 악몽을 꾸면 소설 한 편을 뚝딱 상상해요. 브런치에 드문드문 내 마음대로지만 여전히 글을 쓰고 동화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오늘 다시 17장의 원고지를 보면서 선생님의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려요. '언젠가'가 아니라 '늘' 제게 필요할 원고지를 돌려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저는 여전히 꿈을 이뤄나가고 있어요.


  꼭 어느 날 제 글을 들고 찾아뵐게요. 그때는 조금 웃어주세요!


2022년 2월 20일

글을 계속 쓸 줄은 몰랐던 제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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