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박약이 아니야 엄마 - 오늘의 공황
나는 이제 막 마트 탈출기를 쓸 참이었다. 특정 장소에서 공황발작이 자꾸 일어나면 그 장소를 자꾸 가서 안전하다는 걸 느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철저히 따르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집 근처의 홈플러스는 나 혼자 심심할 때, 엄마랑 장을 볼 때 수없이도 들렀던 곳이었다. 근데 어찌 된 것이 한번 긴장이 되었던 건지 마트의 진열대만 보아도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웠다. 저 멀리 사과를 고르는 엄마에겐 비밀이니 화장실로 뛰어갔다. 숨을 고르고 연신 괜찮다고 말했다. 정말 괜찮아졌다. 하지만 이마트를 가도 똑같았다.
그래도 엄마는 몰라야 했다. 늘 어딘가 아프면서도 병원에 가질 않고 약 서른 난 딸은 감기 걸릴세라 애지중지하는 엄마에게 정신과 약은 정말 기밀이었다. 하지만 아주 유명한 말처럼 불안한 예감은 어긋나지 않는다. 남자친구와 데이트가 있던 날 아침,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녀와서 할 말이 있다는 그 말은 나의 공황 증세를 악화시켰다. 데이트 내내 초조해하다 결국 드러누웠다. 심장은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는데 나는 그것조차도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아주 화가 나있었다.
늘 새벽에 출근하는 엄마는 허리도 펼 겸 하필 내 방 책상 의자에 앉았다. 마침내 가방은 열려있었고, 또 마침 나는 약 봉투를 엄마 몰래 버리기 위해 가방에 담아두었던 것이다. 마침 비어있던 약 봉투에 엄마는 다른 곳에 약을 담아두었나 해서 가방 이곳저곳을 살폈고, 마침 그곳에는 남자친구의 애정 어린 편지가 담겨있었으며, 마침 '어머니께서 못해주는 것은 내가 다 해주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어 버렸다. 엄마가 화난 포인트는 여럿이었겠지만, 내가 아프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고 타인에게는 말했다는 것이리라 예상했다.
충분한 예상에도 나는 어찌할 도리 없이 엄마의 벼락같은 거친 말을 받아내야 했다. 의지박약이라는 둥, 퇴근하고 당신께서 집안일을 다하니 네가 체력이 남아돌아서 그런다는 둥, 내가 네게 못해준 것은 무엇이며 남자친구라는 놈이 뭘 해주겠다는 거냐는 말을 한 번에 와르르 쏟아냈다. 나는 붕괴된 내 마음속에서 주저앉아 울었다. 내가 한심스럽고 죽고 싶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탓은 아니었다. 엄마는 이제 어쩔 수없이 당분간은 공황장애를 가진 딸과 살아야 하기에 나는 울음을 눌러가며 말을 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야. 몇 년 전부터 계속이었어. 내과도, 신경과도, 심장병원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댔어. 그럼 마음이 아픈 거겠지 해서 병원에 간 것뿐이야. 난 나아지고 있어. 그러니까 지켜봐 줘."
엄마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등져 누웠다. 이틀 간은 말이 없었다. 나는 식음을 전폐했고 약만 주야장천 먹었다. (물론 학교에서 급식은 먹었다) 엄마는 밥에 물만 말아서 서서 먹고 그대로 자버렸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나는 늘 먼저 사과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우리 엄마는 자식을 늘 이겼다. 그렇지만 이번엔 엄마가 져야 한다. 내가 아프니까. 눈에 보이진 않지만 오래오래 아팠으니까 말이다.
이튿날 엄마는 말없이 밥상을 펼쳤다. 소고기와 비빔면이었다. 그리고 아주 벼락같이 말했다.
"밥 안 묵을 끼가!"
나도 말없이 밥상 앞에 앉았다.
"아냐. 먹을 거야."
어쩐지 눈물이 주룩주룩 나서 꼭 체할 것 같았다. 그래도 아주 꼭꼭 씹었다. 승리의 맛이었다. 화염 같던 엄마는 촛불이 되어 위태로이 내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은 것이 서운했고, 증상이 있을 땐 바로 연락하라고 했다. 달콤한 키위를 깎아주면서 한약도 맞춰야겠다는 말을 하는 엄마를 보며 부모를 이기는 자식도 참 나쁘단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