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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보일 Jul 05. 2020

저도 몽글몽글한 글을 써보려고요

보통 아저씨 고마워요

적이 생기는 게 인생이 잘못되어간다는 징조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몇 개의 신념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다.
- Alain de Botton
내 인생 상태가 어떤지 가늠이 되는 사진.....ㅎㅎ...

저 멋진 명언에 반해 알랭 드 보통 아저씨의 책을 3권이나 샀다. 할까 말까 할 땐 하지 않는 내게 몇 번 없는 도박이었다. 처음 읽은 책은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처음엔 인생에 거대한 즐거움들을 좇느라 소소한 즐거움을 놓치고 있다는 그의 잔소리에 책을 덮을까 했다. 드라마든 웹툰이든 중반은 넘어봐야 재밌는지 아닌지 판단할 자격이 생긴다는 장난 같은 내 신조로 참았다. 


결론은, 정말 이 아저씨는 대단한 사람이다. 간만에 지적인 모드로 한참을 집중했다. 2시간을 내리읽었다. (와, 나 독서 좋아하네?) '보통' 아저씨의 소소한 즐거움은 호텔에서 혼자 보내는 밤이라든지, 외국의 낯선 환경에 적응한다든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하루의 절반을 툴툴거리는 데 쓰는 못난이에게 연애 초반에나 느끼는 몽글몽글함을 선물하기엔 충분했다.

책 읽는 내내 입틀막...

겪어보지도 못한 일들인데도 어떻게 그의 즐거움이 오롯이 내 가슴에 내려 고이는지 알 수 없었다. 간지러운 마음에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활짝 웃기까지 했다. 위로하려고 애쓰는 글투가 아니었음에도 그냥 그의 즐거움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따수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그런 즐거움을 떠올려봤다. 


나는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좋아한다. 조용한 밤 내 방 안에서 유독 크게 들리는 그 소리는 불안한 내 두근거림을 잠재워준다. 그 아래 격자무늬 공책에 반듯하게 자리하는 내 글씨들은 유난히 사랑스럽게 보인다. 한참을 사각거리다 공책을 바로 놓고 바라보면 조금 비뚤어 보이지만 그래도 참 예쁘다.


아주 아주 연하게 탄 조금 단 까만 커피도 좋아한다. 얼음을 열 방울 정도 넣으면 입보다 코에 먼저 닿는 냉기가 기분이 좋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씁쓸한 것이 모빌 같은 균형감을 느끼게 해 준다. 나의 옅은 커피는 다른 이의 아메리카노의 모던함에는 한참 못 미칠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 적당함이 나를 너무 두근거리지 않게, 너무 나른하지 않게 날 깨워준다.


한참을 써 내려가다 보니 뻔하게도 정말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기만 한 건데도 바보 같은 내 머리가 엔도르핀을 마구 뿜어댄 모양이었다. 기분 좋음이 지나쳐서 오지랖이 발동했다. 별 거 아닌 걸 되새기면서 이상스레 몽글몽글하고 간지러운 이 기분을 다른 사람들도 느껴봤으면. 

아~ 하세용~ 몽글몽글함 들어갑니당~

내게 글은 변기통 같은 존재였다. 몸 안에 쌓인 노폐물을 모조리 쏟아부어서 변기 물 내리듯 내려버리면 내 안은 깨끗해졌다. 그 덕에 글을 쓴 후의 나는 개운했지만, 내 글은 분노나 슬픔이 덕지덕지 묻어 지쳐갔다. 그런 내 글이 싫어졌다는 건 아니다. 앞으로의 나도 분노하고 슬퍼할 것이며 그런 글을 쓰지 않으면 화병으로 지쳐 쓰러질지 모른다. 


그냥, 가끔은 찰나의 즐거운 순간을 기록해두고 싶어 졌다. 간지러운 순간들을 떠올리며 다른 방식의 글쓰기로 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글이 언젠가는 누군가의 몽글몽글함이 되었으면 좋겠다. 서평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이 감사한 다짐을 보통 아저씨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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