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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보일 Jul 08. 2020

실망스런 하루를 보내지 않는 법

너무 기대하지 않기로 해요

10년 지기 친구와 오랜만의 약속이 파투 났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고 나로서는 그에게 충분한 위로를 건넸다. 그런데 일렁이는 마음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활활 타는 마음은 창밖에 내리는 장대비로도 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미안해하는 친구의 카톡에도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이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키보드를 마음껏 두드렸다가는 실수할 것 같았다. 단념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을 때도 식식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지끈지끈한 이 느낌이 씻겨 내려가길 바라며 찬물로 머리를 박박 감았다. 나의 들뜬 아침을 되새겼다. 세상에 몇 없는 나의 8할을 아는 그 친구를 만나 내가 요즘 얼마나 힘든지 털어놓을 참이었다. 오래간만에 짙은 화장을 하고 내 또래와 시시덕거리며 나도 사실은 평범한 20대라는 걸 느낄 예정이었다. 그 모든 기대가 무너진 탓이었다.


아싸인 나를 놀아줄 사람 너뿐이란 말이야.....




약속이 파투 나는 건 사실 자주 있는 일이다. 내가 그러기도, 상대가 그러기도 했다. 수많은 파투 중에 하나였지만 유난히 실망스러웠던 이유는 자주 보지 못하는, 사랑하는 그 친구를 꼭 만날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사실 그 날은 꽤나 괜찮은 하루였다. 상사에게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로 무심하게 마주한 업무는 이상하리만큼 착착 해결됐다. 달갑진 않았지만 나를 싫어하는 상사가 내게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고생했다며 나를 다독였다. 약속은 사라졌지만, 전날 싸운 엄마와 새로운 약속이 생겨 마음의 응어리를 풀었다.


유난히 기대가 되는 날이 있다. 지겨운 장마 속에 맞이한 오래간만의 맑은 아침이 그렇다. 아껴왔던 예쁜 옷을 꺼내고 룰루랄라 출근길을 나서고, 발걸음도 초여름 잎사귀만큼 가벼운 그런 날. 뭐든지 술술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지만, 혼자 떠맡아 그렇게 허우적댔던 프로젝트의 주책임자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인 걸 확인하거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와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싸우는 날. 맑은 하늘이 무색할 만큼 혼란의 호우 속에 무기력하게 서 있는 기분을 느끼는 그런 날 말이다.


어쩐지 꽃도 피고, 구름도 한 점 없더라. 하.




부끄러운 내 마음의 불을 껐다. 아프다던 그 친구에게 무디게 말할 용기가 났다. 괜찮냐고 몸조리 잘하라며 말했다. 그리고 만나서 해주고 싶었던 말들도, 농담 따먹기도 이어갔다. 푸시시 꺼진 내 마음에서 나는 연기가 그 친구에 닿을까 조마조마했다. 어느새 재가 되어 나부끼는 나의 무너진 기대 속에도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소울메이트이자, 사랑스러운 소중한 내 사람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 다음 날도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날씨에 맞춰 옷을 엉망진창 주워 입었다. 조심히 걸어와봤자 질척거리는 양말은 뭘 하든 별로일 것 같은 예감을 불렀다. 풀 죽은 내 마음과는 달리 체크리스트의 모든 일이 처리됐고 주문했던 가방이 이틀 만에 배송됐으며(제주도는 배송이 보통 3일에서 길게는 일주일이 걸린다),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이고 나를 기다렸다. 젖은 양말을 빼고는 정말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였다.


젖은 양말 벗어버리면 그만이지!


너무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꽤나 괜찮은 하루가 거대하게 부푼 기대 앞에 소박해지지 않도록, 원하는 바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나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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