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쓰기의 말들
무덤처럼 옷을 껴입은 노점상 할머니가 조는 소리
왜 일하는 사람들이 가난한가 하는 의심은 마르크스부터 조지 오웰까지 계급과 노동 문제를 다룬 책을 뒤적이게 했다.
은유, <쓰기의 말들> p. 123
짝꿍과 나는 요즈음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우리는 같은 회사의 다른 조직에서 각자 십 수년을 일했고, 내가 먼저 그 회사를 떠나고 짝꿍이 몇 개월 뒤 사직서를 제출했다. 우리는 누구보다 조직의 생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도 몇 년 동안 퇴사를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다. 발화점은 각자 달랐으나, 종착지는 이 조직 내에서는 비전을 찾기 어렵다는 것으로 같았다.
조직 밖의 세상은 놀랍도록 생경하다. 나를 가장 충격에 빠지게 했던 것은 철창 같은 사무실에 내 하루를 전부 팔아서 월급을 받지 않더라도, 돈을 버는 방식은 다양하다는 거였다. 나는 15년 동안 ‘회사원’이었다. 회사를 떠난 자리에서 ‘일자리'를 떠올린 적이 없다. 물건을 사고, 음식을 먹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산 물건이 다음 날 문 앞으로 배달되는 모든 과정 속에 누군가의 ‘일’이 있다는 인식이 없었다는 것이 이제는 더 놀랍다.
내 시간을 파는 방식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나의 삶을 이 하얀 시멘트 벽으로 둘러싸인 사무실에서 계속 썩힌다는 것이 아까웠다. 세상엔 내가 배워야 할 것들이 널려 있었고, 여전히 내 안에는 쏟아내고 싶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조직을 떠나야 했다.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몇 주 지나지 않아 비교적 어렵지 않은 일자리를 찾았다. 연수기간을 거치고 일선에 진입했을 때 비로소 내가 뛰어나간 세상이 보였다. 첫 출근 날 나는 짝꿍의 품에 안겨 길바닥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서글픔이었을까? 내 손으로 놓아버린 편의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 어쩌면 그 모든 것이었을지도. 분명한 것은 그 눈물이 후회의 의미는 아니었다는 거다. 조금 더 일찍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웠을 뿐.
하지만 용기는 준비된 때에 찾아오는 절체절명의 기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15년 만에 찾아온 결단의 순간이 비록 눈물의 회항 같은 것이었더라도, 그 찰나의 기회를 끝내 놓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스스로가 대견하다.
큰 조직은 개인의 역량에 기대어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그 안에서 배우고 느낀 것은 ‘조직의 힘’이었다. 그곳은 개인의 생리만이 난무했고 개별의 성장을 맛보기엔 지나치게 관료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조직이 이끄는 힘에 따라 개인은 자신의 역량을 뛰어넘는 성과를 내기도 하고, 세상은 그것을 조직에 속한 개인의 성취로 평가해주기도 했다. 물론 그 안의 모든 이들이 그렇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눈엔 높은 경력의 담벼락을 자랑하는 선배들 중 그런 이들이 상당히 많아 보였다는 것이다. 나의 10년 뒤 모습이 그들과 다를 것이란 장담을 할 수 없었다.
같은 맥락에서 조직 밖에서 겪는 세상은 개인이 기댈 ‘거대한 힘‘ 따위가 없다. 대신 개인의 역량과 판단과 선택, 그리고 담보되지 않은 간헐적인 성취가 있다. 그래서 어렵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며 공포스럽기도 하다. 나와 짝꿍은 우리가 각자 맞이하는 그런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분야가 다르므로 그 안에서 각자 선택하고 대응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비슷한 생각들을 꿰어내며 서로를 독려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에 대한 생각'을 사회 초년생의 딱지를 걷어내던 때부터 해왔고, 매일 출근하는 새벽 ‘무덤처럼 옷을 껴입은' 이들을 전철역이나 출근길에서 보았다. 그 긴 시간동안 고민한 결과가 지금일 것이다. 그리고 당도한 결과 이면의 세계에서 시작되는 고민을 다시 품는다. 이 시간이 가져올 결과를 내심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