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국 응급실 여정기
지난 금요일 원고의 주제가 ‘응급실 회상’이었던 탓일까. 딱히 응급실을 그리워 한 건 아니었는데 갑작스럽게 응급실을 거쳐 입원에 수술까지 진행하게 되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정말인지,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글은 끝끝내 꽃을 피워버렸다. 어쩐지 요즘 컨디션은 물론 몸 상태가 급격하게 안 좋아진다 싶더니.... 모든 일에는 복선이 있는 모양이다. 가볍게 내과에서 약이나 타올 생각으로 옮긴 발걸음은 ‘이건 내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싶은 생각에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향했고, 그렇게 네 병원을 돌아다닌 끝에 겨우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진짜 ‘응급실 탐방’ 따위를 글감으로 삼는 게 아니었다며 얼마나 후회를 했던지.
코로나로 인한 피해는 기껏해야 ‘마스크 속에 갇혀있기’나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기’ 따위에 국한되는 줄 알았는데 이 역시 엄청난 망상이었다. 처음 간 병원은 코로나 지정 병원으로 선정된 탓에 응급 진료 한 번 받으려면 2시간 대기가 기본이라며 심한 외상이 아닌 이상 다른 병원을 가라고 리스트를 보여주더라. 아파 죽겠는데 그 와중에 어느 정도 규모가 있으면서도 가장 가까워서 택시비를 많이 안 낼 곳을 찾아 다시 병원을 옮겼다. 옮긴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받고 들은 첫 마디는 ‘지금 당장 수술해야 하니, 보호자를 부르세요.’였다. 나한테 설명 좀 해달라니 담석이 담도를 막고 있어서 최대한 빨리 수술해야 한다더라. 뭐 어떻게 되려고 한 날이었는지 유일한 보호자가 될 수 있었던 모친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언니와 동생이 미친 듯이 전화를 걸어 준 탓에 겨우 모친과 연락이 닿았다.
모친 주변에 있던 지인분들이 ‘그 병원은 수술 끝나면 의사가 없어지는 병원(수술 실패율이 높다는 의미)’이라며 그 병원에서 수술하지 말 것을 당부했고, 그 말을 들은 모친은 고민 끝에 나를 응급차에 태워서 다른 병원으로 이송했다. 하필 시국도 시국에다가, 의료진 총파업이 일어난 탓에 일반 진료를 받지 않는 병원이 대다수여서 수술이 가능한 믿을만한 병원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어찌어찌 병원을 옮기고 이전 병원에서 촬영한 CT를 보며 재확인 겸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그 사이 담도를 막고 있던 담석이 자연스럽게 굴러떨어졌더라. 의사는 이건 100% 운이 좋은 경우라며, 큰 수술은 하지 않아도 되나 담석이 많으니 아예 담낭을 제거하는 게 좋겠다는 소견을 피력했다. 이 수술을 잘한다는 병원을 추천받고 결국 또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래도 이때는 혈관 속에 잔뜩 머금은 진통제와 항생제 덕에 무리 없이 부친의 차를 타고 이동했으니 이송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으려나.
옮긴 병원에서 침대를 지정받고 환자복으로 탈의했다. 침대에 앉아서 수술 전 동의 사항을 작성하고 설명을 들으니 어느 정도 실감이 났다.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그보다 시급한 건 비어있는 위장이었다. 전날부터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근 이틀 동안 굶은 상태였고, 아픈 곳을 진통제로 달래고 나니 남는 건 배고픔뿐이었다. 간호사에게 아무리 간절하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말은 ‘내일까지 물 포함 절대 금식’ 뿐이었다. 절망과 피로와 두려움 사이를 방황하다 어느덧 새벽이 찾아왔고, 기다렸지만 반갑지는 않은 내 수술 차례가 다가왔다. 나름 두려움을 웃음으로 승화해보겠다며 난생처음 눕는 수술대에서 의사에게 ‘저 진짜 내일까지 아무것도 못 먹나요?’라고 물어봤고, 의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다가 ‘마취할게요’라며 내 입을 막고 주삿바늘을 꽂았다. 그 이후 기억은 괴로움과 고통뿐이었다.
생살을 찢고 멀쩡하게 붙어있던 장기 하나를 떼어냈으니 안 아플 리가 없지. 분명 마약성 진통제까지 내 팔에 꽂혀있었는데 뭐가 이렇게 아팠는지. 이게 안 달려있으면 얼마나 아플지를 가늠하기 전에 나는 또 다른 진통제를 찾았고, 옆에서 말리던 모친과 간호사는 결국 상의 끝에 다른 진통제를 놓아줬다. 내가 뭐라고 아파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같은 병동을 썼던 아주머니께서 다음 날 아침 대체 무슨 수술을 했길래 그렇게 아파했냐고 물어보시더라. 혹시 시끄러웠으면 죄송하다고 했더니 아니라며 차라리 죽여달라는 대사는 드라마 말고 처음 들어본다고 하셨다. 난 그냥 아팠던 기억밖에 없는데. 역시 강렬한 무언가가 있으면 나머지는 병풍으로 밀리게 되나 보다.
그렇게 모친과 함께하는 병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 1인만 출입할 수 있고 지정된 면회 시간 이외의 출입은 불가했는데,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속해서 그랬는지 별문제 삼지 않아 퇴원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어떤 간호사는 새벽에 모친에게 비어있는 침대에 누워서 쉴 것을 권하기도 했다더라. 참 고마운 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죽도 먹지 못하는 딸 앞에서 하리보와 아몬드 초콜릿을 냠냠 먹는 모친을 바라보다가, 내 회사 일은 못 해도 외주 받은 일은 몇 배의 시간을 투자해서 처리하다가, 다음 날 점심에 겨우 받은 미음을 엄청 맛있게 다 먹은 후 의도치 않게 간호사를 놀라게 했다가(원래 수술 후 첫 끼는 반 그릇 정도 먹는 게 평균이란다. 대체 왜지…?), 전신마취로 인해 쪼그라든 폐를 펴준다는 호흡 기계를 제대로 빨아들이지도 못해 모친에게 놀림거리가 되다가, 면회를 온 건지 놀리러 온 건지 잘 모르겠지만 자매들의 격한 안부 인사도 받았다가, 의사한테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아픔이 되었으니 퇴원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의사는 선물이라면서 내 몸속에서 캐낸 약 30~50개에 달하는 담석 중 몇 개를 용기에 담아 건넸다. 작년에 응급실을 드나들게 만든 원인도 아마 이 친구들 때문이었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를 위험하게 만든 것들을 마주하는 건 늘 두려운 일이라 제대로 바라보기가 두려웠는데, 너무나도 해맑게 웃는 의사 덕분에 이상한 용기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생각보다 크고 흉측했으며 썩 오래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근원을 마주하니 해결된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어찌 된 게 심란한 마음만 커졌다. 담석이 담석으로 보이지만은 않았기 때문이겠지.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했던 20년 8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올리는 이유는 귀찮음이 의지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 다른 원고를 읽어보시고 싶은 분들은 다붓한 공간에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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