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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창호 May 03. 2024

삶의 예술가 김민기

  며칠 전 SBS스페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이란 다큐를 보았다. 이 다큐는 3부작의 1부로 학전 극단과 김민기(1951~)를 다룬 다큐였다. 김민기 다큐를 보면서 일 년 전 연초에 방영된 <어른 김장하>를 떠올렸다. 진주의 어른 김장하는 80대이고, 김민기는 70대인데 노년에 접어든 그들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은퇴하고 있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김민기는 음악과 연극에 쏟은 노력에서 이 시대 문화예술의 ‘어른’이 되기에 넉넉하다. 이 글은 인간 김민기에 대한 우리 시대의 추억을 회상하는 소감문이다. 공동의 경험은 기록해야 한다.      

아침이슬과 그의 노래

  여름의 더운 날씨였다. 반지하방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기타를 들었다. 기타를 둥둥 대며 흥얼 거리다 메모를 하고 곡을 만들곤 하였기에 그날도 그림이 막히자 잠깐 쉬려고 기타를 들고 예전에 쓴 가사를 음미해 보았다. ‘한낮에 찌는 더위’를 읽고 다음에 쓴 ‘그의 시련일지라’를 한참 생각하였다. 왜 나는 삶을, 멀리서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을까. 어머니라면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산모인 문둥이들의 아기를 받아주는 산파일을 돈도 안 받고 왜 해 주었을까? 돈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고,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어서가 아닌가.      

  그렇다. 나의 시련이 되어야 한다. 남이 해 주길 바라면 안 된다. 내 힘으로 해야 한다. 그러니 나의 시련이 되어야 한다. 당연히 ‘그 이제 가노라’가 아니라 ‘나 이제 가노라’여야 한다. 그날 나의 심장은 뜨거워졌다. 남의 고통, 이웃의 고통이 내 것이었다. 그러므로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를 썼다. 가장 낮은 서민들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고, 나 또한 그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자각이었다. 경기고 3학년인 나의 머리에 그날 번개가 쳤다. 나는 가사를 고쳐 <아침이슬> 곡을 완성했던 것이다. 나의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위의 말은 김민기의 고백이다.      

  그는 그 후부터 용기를 내어 가사를 짓고 곡조를 만들었다. 가수가 되기에는, 그의 중저음의 가녀린 목소리는 미성도 아니고 드라마틱한 고음도 불가능하였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래도 세상에 들려 줄 메시지가 있었다. 누군가는 해야 했다. 왜 현실에 무관심한 사랑과 이별의 애상 어린 노래가 대중가요의 전부인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삶의 현실을 반영하는 지사(志士)다운 꿋꿋한 노래말을 지어 곡조를 붙였다. 그런 노래는 거친 삶의 현실에서 저절로 나온 것이었다. 바로 현장성이다. 현장성 있은 노래들은 그 후 사람들의 공감을 받았다.      

‘상록수’는 부평의 공장에서 노동자로 있을 때 동료 노동자들의 결혼식에서 부른 축가였다. ‘공장의 불빛’ 역시 인천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삶의 흔적을 다룬 노래극이었다. 그것은 당시에 위험한 일이었지만 노동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죽기를 각오했다. 그 역시 노동자로서 공장과 탄광에서 10년 이상을 보냈다.      

  그는 꾸준히 메시지 있는 노래를 지었다. 그것은 남에게 보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주변의 삶에 충실한 노래를 만들려는 순수한 동기였다. 시대와 가장 낮은 서민의 삶을 반영하는 곡을 만들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가 만든‘지하철1호선’뮤지컬 역시 서민들의 애환을 해학과 익살로서 보여 준 우리 시대의 풍속화가 아닌가.      

 70~80년대 민중의 깨어난 외침에는 ‘아침이슬’이란 노래가 자리 잡고 있다. 민주화를 열망한 그날의 광장에서 어깨를 두르고 비장한 맘으로 그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다들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의 경험은 역사가 된다.      

     

학전(學田극단 

  우리의 대중문화는 온통 돈이 되는 곳에 몰두하고 있다. 다양성이 없다. 한류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본의 세상에서 돈이 없으면 아무 일을 할 수 없지만, 돈에 매몰되면 창조력과 생명력은 쉽게 고갈된다. 예술의 다양성을 위해 그가 만든 학전이란 극단은 1991년 만들어졌다. 예술의 밭을 갈고자 그 이름을 지었다. 그의 노래를 음반으로 내기로 하고 빌린 돈 오천만원이 극단의 종자돈이었다. 학전은 33년간 쉬지 않고 달리다가 지난 3월 15일 문을 닫았다. 

  김민기는 돈보다 사람을 중시한다. 그 일이 필요하면 돈이 되지 않더라도 실천하는 고집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그것을 ‘쟁이’의 정신이라 부른다. 그러니 예술가로서‘쟁이’의 길은 외롭고 고독한 길이다. 돈이 안 되는 아동극과 청소년극을 꾸준히 올린 것도 누군가는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생각해서이다. 돈이 좀 되는 ‘지하철1호선’ 뮤지컬의 막을 내린 것도 배우들을 소모품으로 쓰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니, 자본의 세상을 거꾸로 살고 있는 셈이다. 그게 어른 김민기의 삶이었다.      

  사천회를 넘게 공연한 그의 ‘지하철1호선’ 열차는 종착지에 도착해 신화가 되어 가고 있다. 한 시대를 마감했고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다. 그는 돈 많은 대기업과 부자들의 후원을 일체 거절하고, 공연 수입으로만 운영하다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종언을 고했다. 영웅의 삶은 고난과 비극 아닌 게 없다.      

  돈 때문에 울고 웃는 게 인생사 아닌가? 가정을 꾸려야 하고 극단을 운영하는 그 역시 돈을 바라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그는 외롭고 고독한 길,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그 길을 힘들게 걸어왔다. 그가 꾸려온 학전(學田)은 말 그대로 공연예술계의 못자리 역할을 해 왔다. 가수 김광석이 일천회의 공연을 한 것으로 유명한 학전은 700여명의 배우와 가수를 키워낸 우리 시대의 모판이었다. 그는 기꺼이 배우인 앞것을 위해, 스탭으로서 뒷것의 역할을 묵묵히 해 왔다.       

그 어른 김민기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가사로 나오고, 절절한 마음에서 곡조가 우러난다. 결국 곡조와 노래말은 한 몸을 이룬다. 늘 뒷짐을 지고 땅만 걷는 김민기는 낮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이 척박한 땅에서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런 의지마저도 초월한 삶을 서른네 살에 지은 ‘봉우리’가 잘 말해주고 있다. 그는 더 낮아지려고 한다. 바다처럼. 인간인 그에게 약점이 없겠는가. 외롭고 고독한 그가 술로 시름을 달랬으니 때론 주사도 부렸을 것이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그의 주사는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잊고자한 한 영혼의 넋두리 아니겠는가. 삶엔 영광과 함께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삶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다. 삶과 작품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큰 감동과 울림을 받는다. 일 년 전 <어른 김장하>를 보고 느낀 감동이 <뒷것 김민기> 다큐를 보고 다시금 일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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