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홀단신으로 온 외국인의 시간은 천천히만 흐르는 줄 알았는데 왠걸 시간이 단숨에 빨라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내 일상을 싱가포르에서 새로 만난 친구들과 채워나가면서 나만 가지던 천천한 시간의 파이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언어는 더 빠르게 익숙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가 되는 시간이 있다. 나도 모르는 새 불이 꺼져버린 밤의 싱가포르와 드라마틱하게 습기가 차오르는 창을 바라보다보면 고독이 스멀스멀 퍼져나가 한여름에도 성에가 낀다.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돌입한 프로젝트가 현재 아시아 리전을 담당하는 큰 미디어/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의 계약해지라는 점이 공교로웠던 한 주. 공교롭다는 단어를 쓰는것이 사실 더 공교로운데 이유는 그 과정에 내 결정이 많이 묻어있기 때문. 이를 준비하고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의 밤들이 지나고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모니터를 보며 씨름했는지. 그리곤 정작 프레젠테이션 당일 계약 해지를 테이블에 던졌을 때 그들의 날것 그대로의 반응를 잊지 못한다. 수 년의 시간을 함께했던 파트너를 이와같은 방식으로 취급했다는 날카롭게 던져진 무례함이라는 단어와 그 감정적 언어의 칼날이 공기중에 떠다니던 그 순간들. 그러면서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그들이 새로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대했던 지난날의 태도들. 그리고 도무지 계산기로 답이 나오지 않는 예산과 비즈니스 모델의 충돌. 그 언어의 칼날이 살을 베어나감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이고 중립적으로 대하려고 했던 나 자신에게 큰 포옹을 해주고 싶었던, 그런 하루. 그날은 유독 힘들고 외롭고 또 정말로 참말로 고독했지.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다음 날부터 더 나빠질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물오른 공격력으로 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날카롭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전에는 정보도 부족하고 언어도 따라주질 않아 주저했던 대화도 먼저 살얼음을 깨고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전에는 용기가 필요했던 일들을 자연스럽게 하나하나 할 수 있게 되는 하나의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다. 온갖 수모를 당했는데 더는 무서울 것이 없지. 심지어 프렌치 레이디인 에이전시 헤드 매니저가 불어로 나에게 본인이 장봐야하는 리스트를 메세지로 보냈다니까 글쎄. 사야하는 치즈는 또 왜그렇게 많던지.
그 수모의 시간들 이후 미팅은 곧 야성적인 경기가 이루어지는 필드였고 나는 매 순간 공격에 대비하기위해 더욱 철저해졌다. 그렇게 총알을 든든히 장전하는 시간들을 갖고 나니 두려울 것도 감정적일 것도 없이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내가 되었고 그 사실에 어깨까지는 아니고 승모근이 조금 더 솟았다. 정말로 솟았다니까. 모든 판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된 이후의 나는 오히려 편안해졌고, 모든 것이 어려워졌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조급해져 태세를 바꿔나갔다. 그 변화를 보는 것은 흥미에 가까웠고 그곳에 더이상의 스트레스는 없었다.
단지 시간은 조금 빠르게 흘러갔을지언정 여전히 매일 반복되는 나의 밤들은 여전히 권태로웠고 한 수저의 외로움과 이 낯선 땅에서 나는 절대로 이해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조금 남아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