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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목」,「시간에 기대어」 감상

by iCahn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께서 한국 가곡 전집 레코드판을 사오신 적이 있었다.


전축 위로 흘러나오던 가곡들을 듣고 있을 때면

어딘가 품격 있는 노래처럼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아직 어린아이의 마음에 다가오 않았었다.


하지만 오직 한 곡만은

그 어린 마음에도 울림을 주었는지,

따라 부르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어 했다.


"목"라는 곡을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


절제된 시와 장중한 선율,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그리움과 숭고함은

곡을 들을 때마다 늘 마음을 울렸다.


자주 찾아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어디선가 곡이 흘러나올 때면

문득 마주친 벗처럼 반가우면서도,

왠지 모를 숙연한 그리움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세월이 제법 흐른 지금,

다시 읽는 절제된 감정과 아름다운 시어(詩語)가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비목」, 한명희 시 / 장일남 작곡



이처럼 오랫동안 내 마음 한켠에 머물러온

"비목"의 정서적 경험을 넘어,

예전과는 다른 결로 그리움이 스며드는 지금,

또 다른 울림을 주는 곡을 새로 만나게 되었다.



"시간에 기대어"


브런치 박스테파노 작가님의

"시간은 늙지 않는다-영화 <필름스타 인 리버풀>"

에서 처음 알게된 곡이다.

이미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나는 이제야 비로소 이 곡을 마주하게 되었다.


담백하면서도 섬세한 시,

그리고 직접 곡을 들었을 때 전해진

잔잔하지만 스며드는 깊은 여운이

나를 한참 동안 멈춰 세웠다.



"저 언덕 너머 어딘가 그대가 살고 있을까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너와 난 나약한 사람


바람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남아 있을까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설움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살아 있을까

후회투성인 살아온 세월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 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 하는

그 시간에 기댄 우리


사랑하오 세상이 하얗게 져도

덤으로 사는 반복된 하루가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 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 하는


그 시간에 기댄 우리

그 시간에 기댄 우리"


「시간에 기대어」, 최진 작사·작곡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간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들,

후회투성이었던 실수들, 소원해진 관계들...


연습 없는 세월의 무게만큼 쌓인 외로움까지

시간의 품에 기대어 담담히 끌어안으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라는 독백 밖에 할 수 없겠지만


남겨진 시간에는

더욱더 "사랑하오"하며 살라는 다짐을 건네는 듯하다


"시간에 기대어"

이제 막 내 안으로 들어와

잔잔한 울림이 천천히 번져가는 중이다.


시간이 더 많이 쌓인 그 언젠가에는

이 곡도 내 삶의 한 장면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아직 시와 곡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아마도 수백 번쯤 더 듣게 되겠지만,


오랜만에 만난 좋은 시와 좋은 곡

전해주는 그 여운을 글로 남겨

오래 간직하고 싶다.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사랑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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