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역(Central Station, 1998. 브라질, 월터 셀러스)
우리에게 브라질 영화는 좀 낯설다. 감독도 배우도 모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영화는 그 해에 베를린 영화제 황금 곰상과 여우주연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수작이다.
타인의 사정이나 감정에 무감각했던, 마음이 사막처럼 메말라버린 중년의 여성이 엄마를 잃고 혼자 남은 아홉 살 소년의 아버지를 찾아 사막을 지나 지구의 끝까지 간다. 두 사람의 여정을 따라가는 영화는 로드무비이면서 동시에 중년 여성 도라가 인간성을 회복해가는 일종의 성장기라고도 할 수 있다.
도라는 리우 데 자네이로(간단히 리우라고도 한다)의 중앙역 앞에서 돈을 받고 편지를 대필해 주는 일을 한다. 자칭 전직 교사라고 하지만 그것도 의심쩍다. 남녀노소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도라 앞에서 자신의 사연을 풀어놓는데 그 사연만 들어도 재미있다. 그러나 이 편지들이 전달되는 일은 없다. 도라는 이를 찢어버리거나 서랍 속에 넣어둔 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하루 일이 끝나면 관리인이 나타나 자릿세를 받아간다.
영화가 시작하면 도착한 열차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플랫폼이 금새 사람들로 가득 찬다. 출근 시간의 우리나라 지하철과 흡사하다. 다른 것은 기차가 낡았고 몹시 무질서하다는 사실이다. 저녁 기차가 도착하면 힘이 좋은 남자들은 먼저 자리를 차지하려고 창문으로 뛰어든다. 도라는 힘없이 만원 기차의 손잡이를 잡고 퇴근한다.
아들 조슈에를 데리고 온 젊은 엄마는 도라한테 남편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한다. 원망과 사랑과 그리움…. 돌아선 그녀가 길을 건너는데 달려드는 버스, 아들 조슈에는 쓰러진 엄마에게 달려가지만 아무도 아이에게 신경쓰지 않는다. 조슈에는 혼자 거리에 남겨진다. 소년은 나중에도 엄마가 제대로 묻히기나 했는지 알지 못한다. 한 사람의 죽음이, 남은 가족이 이렇게 취급되는 사회라니…
누군가 역의 매점에서 물건을 훔쳐 달아나자 관리인은 도둑을 쫓아가 그 자리에서 총으로 사살한다. 하찮은 물건 하나 훔친 사람을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1990년대의 브라질이라는 나라의 상황이 궁금해진다.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로라는 대도시, 사람은 차고 넘치고 더럽고 무질서하고 사람의 목숨이 하찮은 도시, 살벌한 정글이다. 1964년 미국의 지원 하에 쿠데타를 일으켰던 군부의 독재는 1985년 민간 출신 대통령이 선출됨으로써 20년 만에 끝났지만 경제는 이미 다 망가진 상태였다. 그 사이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다. 영화는 이런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혼자 남은 소년 조슈에, 대합실 바닥에 쭈그려 자고 있는 소년에게 관리인이 다가간다. 그러자 도라가 아는 아이라며 관리인의 손에서 빼낸다. 조슈에를 집에 데리고 온 도라는 아버지를 찾아 갈 거라는 소년에게 너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을 거라고 하지만 소년은 아버지는 훌륭한 목수였다고 항변한다. 조슈에는 도라의 서랍 속 부치지 않은 편지뭉치에서 엄마의 편지를 발견한다. 다음날 도라는 관리인을 찾아가 돈을 받고 조슈에를 넘긴다. 부자나라로 입양된다는 말을 믿은 것인지, 믿는 척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친구의 추궁과 그들은 아이들을 죽여 장기를 파는 입양사기꾼이라는 말에 결국 조슈에를 찾아온다. “세상엔 해선 안 될 일이 있는 거야.” 하는 친구의 말이 말라버린 그녀의 양심을 자극한 것이다. 받은 돈은 이미 써버렸으니 속임수로 안에 들어가 아이를 데리고 도망쳐 나온 것이다.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된 도라는 친구에게 뒷일을 맡기고 소년의 아버지를 찾아 떠난다. 남쪽 끝 리우에서 주소 하나 들고 사막을 지나 북동쪽 끝에 있는 조슈에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도라의 집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 뭉치를 본 조슈에는 당신은 나쁜 사람이라고, 당신이 싫다고, 혼자 가겠다고 고집부리지만 결국 같이 버스를 타고 떠난다. 누런 흙먼지가 날리는 사막의 먼 길을 가기에는 너무 낡은 버스, 도라를 미워하고 계속 험한 말을 하던 조슈에는 정작 도라가 버스 기사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혼자 내리자 자기도 버스에서 내린다. 도라는 혼자 먼 길을 갈 아이를 위해 조슈에의 가방에 돈을 넣어줬는데 조슈에가 가방을 두고 내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빈 털털이로 휴게소에 남게 되었다. 다행히 친절한 화물차 기사를 만나 차를 얻어 타고 맥주도 대접받게 됐지만 그의 친절에 너무 감동한 탓일까, 도라의 지나친 친밀감에 부담을 느낀 화물차 기사는 두 사람을 남겨두고 떠난다. 화장실에 가서 다른 여자의 립스틱까지 빌려 몸단장을 하고 나온 도라는 떠나는 화물차를 보고 슬픔에 잠긴다. 처음에는 당신이 싫다고, 왜 화장을 안 하냐고, 여자 같지도 않다고 싫은 소리만 하던 죠슈에가 떠나는 남자를 보면서 “쫄아서 겁먹은 거예요.” “아줌마, 립스틱을 바르니까 정말 예뻐요.” 하면서 도라를 위로한다.
두 사람은 순례자들을 가득 태운 트럭을 얻어 타고 주소지를 찾아갔지만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다시 새 집을 찾아가야 하지만 차비도 없는 두 사람은 실의에 빠진다. 마을은 마침 성모에게 바치는 성촉절이라는 가톨릭의 중요한 축제일이었다. 브라질 북동부 지역 어디에서나 중요한 가톨릭 축제로 여겨지는 이 날은 원래 이 지역에 있던 이교도들의 축제가 가톨릭과 융합된 것으로 축제의 절정은 모든 순례자들이 촛불을 들고 교회를 향해 행진하는 순간이다. 트럭을 타고 온 무리들도 축제에 참여하러 온 순례자들이었다. 돈 한 푼 없어 갈 곳 없게 된 두 사람은 말다툼을 하고, 도라의 심한 말에 조슈에는 순례자들의 무리 속으로 도망가 버린다. 소년을 찾으러 촛불의 물결을 헤치고 교회까지 온 도라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친 데다가 사방에서 외치는 기도소리와 흔들리는 빛무리에 쫓겨 쓰러진다. 밖에서는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사방이 빛이다. 어둠을 이긴 빛의 축제인 것이다.
날이 밝자 도라는 조슈에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고 조슈에는 도라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다. 계속 투닥거리고 날선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진 것이다. 마치 빛의 세례를 받은 것처럼… 촛불 축제는 종교적인 의미와 상관없이 두 사람의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무일푼으로 맥없이 앉아있던 두 사람은 조슈에의 활약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수많은 순례자들을 보고 조슈에는 꾀를 내어 성자에게 보내는 기도문이나 편지를 써준다고 외치고 다니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두 사람은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들도 남들처럼 성자 상 앞에서 같이 사진을 찍고 하나씩 나눠 가진다. 조슈에는 치마를 입으면 더 예쁠 거라며 도라에게 원피스를 선물한다. 도라에게 못된 말만 하던 조슈에가 변했다. 숙소에서 조슈에가 “어차피 버릴 거잖아요,” 하면서 편지들을 쓰레기통에 넣자 도라는 아니라며 편지를 챙긴다. 이번에는 도라도 편지들을 부쳐줄 것이다. 두 사람은 이렇게 조금씩 변해간다.
다음날, 두 사람은 다시 낡은 버스를 타고 주소에 적힌 집을 찾아간다. 가는 길에 도라는 잊을 사람이면 사진은 찍어서 뭐하냐고 하면서, 열여섯 살에 가출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수 년 후에 만난 딸을 알아보지도 못하던 술주정뱅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음을 연 것이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곳은 똑같이 생긴 집들이 끝없이 이어진 동네, 새로 생긴 정착지이다. 그러나 그곳에도 아버지는 없었다. 집을 나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한다. 도라는 조슈에한테 같이 살자고 하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집의 물건들을 팔아달라고, 정착하면 연락하겠다고 부탁한다.
조슈에의 이복형 이자예스가 아버지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온다. 친절한 그는 조슈에의 이름을 묻지만 소년은 그를 경계하고 가짜 이름을 댄다. 아버지를 따라 목수가 된 또 다른 이복형 모제쉬도 집에 있었다. 두 형은 조슈에의 정체를 모르지만 아버지의 친구라는 도라의 말을 믿고 두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다. 조슈에는 벽에 걸려 있는 엄마 아빠의 사진을 발견한다. 이자예스는 도라에게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가 아나, 곧 조슈에의 엄마를 만났지만 아나는 임신한 몸으로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버리고 리우로 떠났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는 아나가 조슈에의 엄마라는 사실을 아직 모른다.
이자예스는 육개월 전에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를 도라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아버지는 편지를 쓸 수 있는데 장성한 두 아들이 글을 못 읽는다는 사실은 우리에겐 참 낯설다. 나이 든 아버지는 글을 못 읽어도 자식 교육은 시키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가 아닌가. 혹은 아버지도 도라 같은 사람에게 대필을 시켜 편지를 보낸 것일까. 아버지는 조슈에의 엄마를 기다리며 매일 술을 마시고 술값으로 돈을 다 탕진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나에게 쓴 편지에서 세 소년의 아버지는 아나를 찾아 리우로 왔지만 만나지 못했다며 집으로 갔으면 떠나지 말고 꼭 기다려 달라고, 꼭 돌아가겠다고 다짐한다. 다 함께 같이 살자고, 당신과 나와 이자예스, 모제쉬와 함께…, 여기까지 읽은 도라는 고개를 숙인 조슈에를 보고는 “그리고 보고 싶은 아들 조슈에와 함께…” 라고 덧붙인다.
다음날 이른 새벽, 소년들이 모두 잠든 사이에 도라는 조슈에가 사준 원피스를 입고 몰래 집을 나선다. 어제 읽어준 편지와 아나가 남편에게 부쳐달라고 부탁했던 편지를 두 사람 사진 밑에 나란히 놓고 리우행 버스를 타기 위해 문을 나선 것이다. 뒤늦게 잠을 깬 조슈에는 떠나는 도라를 붙잡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어가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도라는 버스 안에서 조슈에에게 편지를 쓴다. 아빠는 꼭 돌아올 거라며, 나를 기억해 달라고, 나보다 형들과 함께 있는 게 행복할 거라고… 나를 기억하고 싶을 땐 같이 찍은 사진을 보라고, 아버지가 그립다고, 그리운 게 너무 많다고… 눈물을 훔친 도라는 둘이 같이 찍은 작은 사진을 들여다본다. 떠나는 버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조슈에도 사진을 꺼내 본다.
영화에는 두 사람의 관계의 변화와 성장 과정만이 아니라 브라질 사회의 어두운 면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만연한 문맹과 버려지는 아이들,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 장기밀매, 범죄, 폭력, 등등… 반면에 리우라는 대도시에서 북동부의 오지를 찾아가는 길은 광대한 사막의 야생적인 풍광이 눈길을 끈다. 거친 바위산과 초목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메마른 땅이지만 광대한 대자연이다.
누런 흙먼지 같은 갈색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색깔이다. 리우의 기차역도, 낡은 기차도, 도라가 사는 낡은 아파트도 역과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모두 누런색을 띄고 있다. 두 사람이 지나는 사막과 낡은 버스, 도착한 동네 어디나 맨땅이고 흙먼지가 날린다. 가난한 사람들의 낡은 옷차림도 모두 누런색을 띤다. 누런색은 가난과 메마름을 보여준다.
브라질에서 북동부는 남쪽 해안지대의 대도시와 대비되는 브라질의 배후지, 오지이며 빈곤한 지역이다. 19세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북동부의 오지에서 남부의 대도시로 이주함으로써 리우 등의 대도시는 현재 인구문제를 앓고 있으며, 영화의 첫 장면에서 기차에서 쏟아져 나와 플랫폼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두 사람은 이런 이주민들과는 반대로 남쪽 대도시 리우에서 북동부의 오지를 찾아가는 여정을 밟는다. 아버지의 집이라고 찾아 간 곳은 황량한 벌판에 엉성한 나무 울타리 안의 허름한 집, 북동부 지역의 전형적인 주택이다. 길이나 마당은 모두 누런 맨땅이다. 두 이복형이 살고 있는 새 집도 공장에서 찍어낸 듯 똑같은 날림집들이 줄지어 서있는 삭막한 곳이지만 두 형은 낯선 이방인인 두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준다.
두 사람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광막한 사막을 지나온 것은 리우라는 대도시의 비인간적인 거대한 중앙역, 폭력과 혼돈과 죽음의 공간에서 가난하지만 인간 본연의 사람다움과 우애, 연대감이 살아있는 거친 자연의 땅으로 오기 위한 긴 여정이었다. 그것은 또한 도라가 잃어버렸던 사람다움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도라는 다시 리우로 떠나지만 그녀가 들여다보는 작은 사진은 그녀를 조슈에와 연결해주는 끈인 것이다.
도라 역의 페르난다 몬테네그로는 브라질의 유명한 원로배우지만 조슈에 역의 비니시우스 올리베이는 거리에서 구두닦이를 하다가 캐스팅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모두 현역 배우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