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에서 르네상스까지
<사크로 스페코 성당의 벽화들>
거대한 수직 암벽에 붙어 높이 솟은 수도원은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베네딕토가 기도와 묵상을 하던 ‘사크로 스페코’가 있는 아래 성당은 12세기말에 동굴을 중심으로 지어졌고, 위 성당은 14세기 중엽 다시 그 위에 세워졌다. 워낙 좁은 절벽에 붙여 짓다보니 위 성당과 아래 성당으로 나뉜 내부는 상당히 협소하다.
드디어 우리를 안내해줄 마리오 신부님이 나타났다. 마리오 신부님의 이탈리아어 설명과 바오로 신부님의 통역으로 우리는 수도원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수도원 성당은 복잡한 미로처럼 얽혀 있는 경당(작은 개인 예배소)과 방들마다 각기 다른 시대에 그려진 프레스코 회화들이 가득 차 있어 눈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를 정도였다.
천정과 벽면에 가득 찬 회화들은 유럽의 많은 수도원과 성당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때로는 너무 많은 벽화와 조각들에 질린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성당의 벽화는 대부분 문맹자였던 당시의 민중들에게 성경 내용과 성인의 발자취를 이해시키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당시의 성경은 라틴어로 씌어졌고,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성직자를 제외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귀족들 중에도 라틴어를 못 읽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경의 독서와 해석을 독점한 성직자들은 일반 신도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이는 곧 그들의 권력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데서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글도 모르고 성경책을 소유할 수도 없었던 일반 민중들은 성당의 벽화나 조각, 스테인드글라스의 그림을 통해 성경을 이해했던 것이다.
한편으론 이러한 벽화나 조각들이 서양미술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건축을 포함하여 중세의 서양미술사는 기독교 미술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뿐 아니라 문학에서도 성경의 이야기와 성자의 생애는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니 기독교 없는 유럽문화는 상상할 수도 없다.
프레스코 벽화로 가득 찬 성당 내부
위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들은 14-15세기의 움브리아 파와 토스카나 파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인데 마리오 신부는 이를 다시 세분해서 설명해 주었다.
첫 번째 방에는 예수의 생애, 특히 수난을 그린 벽화가 주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사복음서를 재현한 그림은 1550년 움브리아 지방의 일파인 페루지아 파가 그린 그림인데, 위 성당의 프레스코 회화 가운데 가장 최근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1550년 그림이 가장 최근이라니, 성당의 역사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무시한 그림들이었다.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주위에 성모마리아와 성 요한, 베네딕토와 프란치스코 성인, 스콜라스티카와 클라라 성녀가 함께 있는 그림이다. 한 시대에 같이 있을 수 없는 이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1223년에 이곳에 왔었다고 하니 사크로 스페코와 인연이 있지만, 베네딕토와는 시간적으로 700년의 거리가 있다. 그러나 민중들에게 그런 역사적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숭배하던 성인들이 예수의 십자가를 둘러싸고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또 하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둘러싸고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복잡하고 화려한 그림이다. 화면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로마 군인 대신 사라센 군인과 몽골인들이 보인다. 1350년에 제작된 시에나 파 화가들 그림인데, 당시 교회의 적들은 사라센인과 몽골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라센인들은 오랜 십자군 전쟁이 말해주듯이 교회의 적일 수밖에 없지만, 몽골인이 그려진 것은 의외였다. 몽골의 칭기즈칸이 1227년에 사망했으나 그의 자손들에 의해 정복 전쟁은 계속되었고, 서방세계에서 그는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그림들은 역사적 사실보다 당대의 민중들의 신앙과 바람,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 방은 베네딕토 성인의 생애를 그린 벽화들로 가득했다. 1400년대에 그려진 것들로 이탈리아 움브리아 파의 그림이라고 한다. 시에나 파의 밝고 화려한 색채와 달리 노란색과 갈색을 위주로 한 벽화는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주었다. 중세의 그림들은 화려함을 지향해서 원색을 많이 썼으며, 노랑과 갈색은 불쾌하게 여겨 그다지 좋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인에 대한 독살 음모를 그린 두 그림의 어두운 노란색과 갈색은 정말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베네딕토를 독살하기 위해 건넨 독이 든 포도주 잔이 깨지는 장면
미로 같은 방들을 지나 아래성당으로 내려가니 성인이 삼 년간 기도와 묵상을 하던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거룩한 동굴)’가 나타났다. 말이 동굴이지 사실은 절벽의 바위가 움푹 들어간 자리였다. 베네딕토는 이곳에서 빵과 물만 섭취하면서 기도와 묵상으로 삼 년을 수도했다. 몸을 누이기도 마땅치 않은 이 좁고 경사진 바위틈에서 어떻게 삼 년을 지낼 수 있었는지… 단 하루도 견디기 힘든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동굴에는 하얀 십자가와 빵을 내려 보내던 바구니, 대리석으로 빚어진 젊은 베네딕토의 조각상이 있다. 베네딕토는 고요히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순종의 자세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듯한 표정이다. 이는 유명한 조각가 안토니오 라찌의 1657년 작품이다.
부유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스로 고독과 고행을 찾아 나선 젊은이, 신앙의 유무를 떠나 이런 곳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삼 년을 보낸 성인의 굳은 마음과 순명의 자세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아래 성당에는 익명의 화가가 그린 성 프란치스코의 초상이 있다. 1223년 이곳을 순례한 프란치스코를 기념하여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프란치스코 생존 시에 그려진 최초의 초상화로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그림은 퇴색했지만, 단순하고 소박한 그림이 마음을 끈다. 초상화에는 오상(五傷,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받은 다섯 군데 상처, 곧 두 손, 두 발, 옆구리의 상처를 성 프란치스코도 받았다고 하여 이를 오상이라고 한다.)이 없으며 후광도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벽화 가운데 죽음에 관한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말을 탄 죽음의 사자가 간절한 얼굴로 기도하는 늙고 가난한 이들을 비껴서 부유한 젊은이의 어깨에 칼을 꽂는 장면이다. 죽음은 남녀노소와 빈부를 가리지 않으며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죽음 뒤에 오는 육체의 소멸 과정이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나란히 놓인 세 개의 관은 생생한 육체와 벌레 먹고 부패한 육체, 마지막으로 썩은 육신마저 사라지고 뼈만 남은 죽음의 모습을 보여준다. 섬찟한 내용이지만 너무 직설적이라 차라리 소박하게 보였다. 그림을 본 중세의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을까, 아니면 눈앞에 다가오는 죽음에 두려움을 느꼈을까.
성당의 그림들은 주로 14-15세기에 그려진 것들이다. 15세기는 유럽에서 죽음에 대한 관념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시대였다. 14세기 중엽에 인구의 절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고 난 뒤 중세인들에게 죽음의 공포는 극대화되었다. 중세의 종말관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주제는 예로부터 기독교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지만, 특히 15세기에 삶의 모든 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세속을 부정하고 멸시하는 종교적 논설들은 육체의 부패와 해체가 주는 공포를 사람들에게 각인시켰으며, 무덤의 비석에는 썩어가는 시체들의 무서운 모습을 갖가지 형상으로 그려 넣어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했다.(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피렌체의 한 성당에 있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는 최초로 원근법을 회화에 적용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화가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그림 밑에 무덤과 유골이 누워있는 모습을 그려놓고 그 위에 라틴어 문구를 적어놓았다. 그것은 “지금 모습의 나는 원래 당신과 같은 모습이었다. 당신도 나의 모습처럼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메멘토 모리, 이 문구를 읽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아래 성당을 지나 성당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나오니 작은 마당에 햇살이 강렬했다. 수직으로 올라간 수도원 건물은 아득하게 높았다. 반대편을 올려다보니 거대한 바위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여기는 높고 험한 산중인 것이다.
6세기에 설립돼 10세기에 이르러 유럽을 대표하는 수도원이 된 베네딕토 수도회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노동의 신성성’을 확립한 것이다. 이집트의 광야에서 은둔자로 살았던 초기의 수도자들은 기도와 명상과 함께 육체노동을 중시했다. 노동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베네딕토가 살던 당시 유럽에서 노동은 노예들이 하는 천한 일이었으며, 귀족들은 일체의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수도원에도 귀족 출신 수도자들을 대신해 주방이나 빨래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베네딕토의 <수도 규칙>은 기도와 노동과 찬미를 강조했다. 귀족 출신의 수도자들이 스스로 땅을 일구고 노동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워준 것이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vora)’는 베네딕토 수도원의 모토이며, 그 정신은 유럽과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수도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노동의 신성성을 강조한 베네딕토의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서양 정신사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두 번째로 베네딕토 수도회는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혼란한 중세 유럽사회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만성적인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수도원은 막대한 영지를 가진 대토지 소유자였다. 수도자들이 직접 땅을 일구고 개간해서 토지를 확장하기도 했지만, 중세의 불안한 삶을 신앙에 의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수도원에 기부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질병, 굶주림에 시달리던 평민들은 수도원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기근에서 벗어낫다. 그리하여 마을이 형성되고 유럽사회는 서서히 안정되어갔다. 유럽의 야만인이었던 독일의 게르만족은 토지부족과 만성기근으로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나 게르만족 사회에도 베네딕토 수도회가 들어가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이들도 약탈을 멈추고 안정된 사회를 형성하면서 문명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크리스토퍼 브룩은 “물질적인 면뿐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성 베네딕토 수도원은 하나의 소우주로서 서로마 멸망 이후 야만의 시대에 건전한 정신을 유지한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고 평가했다(『수도원의 탄생: 유럽을 만든 은둔자들』). 그러나 중세 유럽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베네딕토 수도회는 프란치스코가 살던 13세기에는 많이 기울어졌다. 이때 프란치스코회 작은 형제들이 산속에 버려진 베네딕토 수도회의 작은 기도처에서 영성을 꽃피웠다고 한다.
베네딕토 수도원 성당을 돌아보고 나온 후, 일행들 사이에 각 종교의 노동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에서 노동은 마지못해 하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 수행의 일부로 여겨진다. 그러나 종교 단체의 규모가 커지고 부유해지면 사제나 수도자들이 노동을 기피하게 된다. 그것은 부패와 타락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유럽에서도 수도원들이 점차 부유해지고 타락하자, 청빈을 유지하고 좀 더 엄격한 수도생활을 원하는 일부 수도자들이 부유한 수도원을 떠나면서 새로운 수도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노동을 천하게 여겼던 중세의 유럽과 달리 우리에게는 하늘에 순명하고 묵묵히 일하며 안분자족(安分自足)하는 농부의 전통이 있었다. 양반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지만, 명분상이나마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하여 이를 높이지 않았던가. 유럽에는 농노라는 신분이 있듯이 농사일은 천한 노예들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농부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하여 양반 다음가는 두 번째 신분이었다. 이러한 전통이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베네딕토의 정신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수도원의 탄생>
유럽에 수도원이 생기기 이전, 초기 기독교에서 최초의 수도원은 이집트의 광야에서 시작되었다. 3세기 중엽 로마 황제 데키우스(Decius)가 로마의 신들을 경배하라는 포고령과 함께 그리스도 교도들을 박해할 때, 기독교인들은 고문과 죽음을 피해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이후 덕을 닦기 위해 사막에 남기도 하고 박해가 끝난 후 귀향하기도 했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대거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성경을 양식으로 삼은 그들에게 사막은 더 이상 두려운 곳이 아니었다. 3세기말이 되면 긴 나일 강 연안과 삼각주 분지에는 강안의 경사진 암벽 동굴이나 움막에서 생활하는 수도승들이 있었다. 이들은 점차 세상으로부터 은둔하여 처음에는 나일강 인근의 사막에 거주했으나, 사막의 맛을 알게 되면서 더욱 사막 깊숙이 들어가 암자를 지었다.
그들은 세상과 철저하게 단절하고 은둔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의 덕행과 수많은 일화가 전파, 확산되면서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사막으로 들어가는 수도승들은 계속 늘어갔으며 그들은 사막에 암자를 짓고 생활했다. 세상으로부터 은둔하기를 원했던 이들 수도승들 덕분에 수도생활의 거점들이 사막 한가운데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나일강 연안이나 삼각주의 비옥한 인구밀집 지역을 포기하고 사막으로 들어간 이들 이집트 독(獨)수도승들을 ‘사막교부’라고 부른다. 사막의 삶은 비참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사막교부들이 원했던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안락함을 경멸하고 불모의 사막의 무서운 고독과 황량한 근심을 사랑했다. 이들 사막의 수도승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고난을 닮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고독을 찾아 사막으로 들어간 이들은 고독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4세기 말에 이르면 이들 사막의 거점에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수도승들이 있었다고 한다. 은수자들이 너무 많아지자 더 큰 고독을 갈망한 수도승들은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갔다. (뤼시앵 레뇨, 『사막교부, 이렇게 살았다』)
이집트의 광야에서 기독교적 금욕을 실천하며 수도했던 은둔자 가운데 세상에 알려진 최초의 인물은 이집트인 안토니우스(?-356)이다. 또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공동체적 수도원 생활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역시 이집트 수도자인 파코미우스(?-347)였다. 두 사람 모두 기도와 명상과 함께 노동을 수도자의 필수적인 요소로 정해놓았다. 뒤이어 그들을 모방한 많은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공동체 생활은 수도자의 필수요소가 되었다. 지금의 터키 땅 카파도키아의 주교였던 바실리우스는 파코미우스가 만든 공동체의 규범을 바탕으로 <수도규칙>을 저술했는데, 그는 노동과 공동체 생활을 수도생활의 요체로 강조했다. 바실리우스는 동방교회 수도원과 수도자의 삶에 대한 신학적 스승이 되었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과 시리아에도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들이 형성되었으며, 비잔틴 즉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원들은 바실리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바실리우스는 특히 수도생활의 핵심을 공동체 생활에 두었으며 수도원을 광야가 아닌 도시 한복판에 세우면서 수도원들이 사회 구제 기관과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의 수도원 공동체는 동방교회 수도원의 전형이 되었으며, 바실리우스는 동방교회 수도원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동방교회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잡은 수도원이 서방교회로 전해지면서 서방교회사에 특별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성 파코미우스와 성 바실리우스가 이집트와 동방에서 수도 생활의 기초를 닦았다면 서방에서 이러한 역할을 했던 사람은 성 베네딕토였다. 베네딕토 수도원은 그의 역사가 곧 서방교회 수도원의 역사라고 할 정도로 서방교회 수도원의 중심이 되었다. (최형걸, 『수도원의 역사』)
초기의 사막교부를 비롯하여 수도자들에게 금욕은 수도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아가 더욱 더 험한 곳으로, 더 살기 힘든 곳으로 찾아가 고행을 자처하는 수도자들도 많았다. 현대를 사는 비종교인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중세인의 생활과 사상을 현대인의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
현재의 이집트와 근동의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사실을 생각하면 기독교 초기의 역사적 사실들이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도 이집트 인구의 10퍼센트, 팔백만 이상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집트의 기독교를 콥트 정교회라고 하며 이 교인들을 콥트교도라고 부른다.
수도생활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종교 일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속세를 떠나 엄격한 금욕생활을 통해 보다 깊은 영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는 불교의 근본적인 지향의 하나이기도 하다. 한국 불교의 경우 대부분의 사찰이 이미 속세를 떠난 산중에 있어 그 자체가 수도원과 같은 역할을 한다. 사찰의 공동생활을 떠나 혼자서 더 깊은 묵상에 잠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암자를 짓고 홀로 수도생활을 하기도 한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