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수도원 기행4

중세에서 르네상스까지

by 이인숙 insouk lee


4. 치비타 디 바뇨레죠(Civita di Bagnoregio)



이탈리아 수도원 기행의 둘째 날, 성 베네딕토의 성지 수비아코를 떠나 ‘천공의 성’ 치비타 디 바뇨레조로 향했다. 지나는 길에 가끔씩 언덕 위나 산꼭대기에 오래된 고대도시들이 보인다. 아래에 넓은 평원을 놔두고 왜 물도 구하기 어려운 산꼭대기에 도시를 만들었을까.

5세기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오랫동안 왕국과 공화국, 공작령, 교황령 등 여러 도시국가들의 집합체로 이어져 왔다. 이들은 각자 고유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발전과 쇠퇴를 거듭했으며, 이탈리아 반도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다. 1400년 동안이나 각기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살아온 이탈리아 반도의 각 지역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으며, 때로는 동맹을 맺고 때로는 전쟁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이웃의 강대국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독일), 스페인도 항상 기회를 노렸으며 이탈리아 반도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때문에 적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와 같은 개념으로 산꼭대기에 도시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전투가 없을 때는 평지에 내려와 농사를 짓고, 전쟁이 시작되면 산꼭대기 마을에서 적을 막았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구려를 산성국가라고 한다. 고구려의 도읍지에는 평지에 성이 있으면 배후에 반드시 산성이 있었다. 평화 시에는 평지의 성에서 지내다가 전쟁이 나면 모두 산성으로 올라가 적을 방어했던 것이다. 고대 이탈리아 도시들이 산꼭대기에 발전한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바뇨레죠는 2500년 전에 에트루리아인들이 건설한 도시이다. 바뇨레죠의 ‘바뇨(Bagno)’는 욕조, ‘레죠(regio)’는 지역이라는 뜻이니, 바뇨레죠는 곧 ‘욕조지역’이라는 말이 된다. 원래는 인근 지역과 이어진 땅이었으나 지진과 풍화작용으로 마을 주위가 내려앉으면서 욕조처럼 분지를 이루고, 우리가 찾아갈 치비타 디 바뇨레죠만 공중도시처럼 솟아올라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곳은 지금도 조금씩 붕괴되고 있어 20세기 초까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죽은 도시였지만, 1970년대에 독일인들이 전기와 수도를 놓으면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델이라는 주장도 있다. 안개 낀 날의 치비타 디 바뇨레죠는 낮게 깔린 안개에 둘러싸여 구름 위에 떠 있는 진짜 ‘천공의 성’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바뇨레죠에 도착한 날은 햇빛이 쨍쨍한 더운 날씨였다. 다행히 다리 입구에 안개 낀 날의 바뇨레죠를 보여주는 사진이 있었다. 사진은 정말 <천공의 성 라퓨타>를 떠올리게 했다.

이곳에 가려면 바뇨레죠 마을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치비타 디 바뇨레죠 근처까지 가서 푹 꺼져버린 땅을 이어주는 좁고 긴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말 그대로 ‘육지 속의 섬’인 것이다. 이 ‘섬’을 육지와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인 길고 좁은 다리 앞에 서니 주위가 모두 푹 꺼진 넓은 분지 가운데에 ‘공중도시’가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솟아 있다.

공중도시 '치비타 디 바뇨레죠', 오른쪽의 하얀 경사면은 지대가 무너져가는 것을 보여준다.
안개 낀 날의 '천공의 성' 치비타 디 바뇨레죠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갔다. 입구의 기념품가게를 지나니 성당과 광장이 나온다. 죽어가는 도시라고 하지만 지금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유럽에는 잘 보존된 아름다운 중세도시들이 많지만, 이처럼 오래된 고대도시는 처음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주로 로마시대의 모습이지만, 마을에는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2500년 전 고대인들이 걷던 골목과 시장, 로마인들이 드나들던 성당과 광장, 길가의 작은 가게들, 이런 고대도시를 그들과 함께 걷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들의 숨결이 아직도 공기 중에 남아 있을까.

마을은 밖에서 보기보다 넓었다. 그러나 이 ‘공중도시’ 가장자리로 가면 지금도 무너져가는 절벽이 보인다. 절벽에 면해서 담의 일부만 남은 곳은 철문을 달고 자물쇠로 채워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절벽으로 떨어진다. 바뇨레죠를 둘러싼 평원에도 푸른 녹음 속에 하얗게 무너져가는 땅들이 보인다.


계단 밑으로 더 이상 가지 못하게 철문을 달았다. 철문 밖은 절벽이다



바뇨레죠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푹 꺼진 분지 너머로 제법 큰 마을이 보인다. 그곳도 계속 무너지고 있어 언젠가는 여기 바뇨레조처럼 될 것이라고 한다.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마을 가장자리가 계속 깎여나가고 있는 것이다. 화산재가 만든 응회암 지대라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고대 에트루리아 사람들도 이 지대의 화산활동과 대지의 불안정성 때문에 기원전 280년경에 이곳을 떠났는데, 그 후 로마인이 들어와 에트루리아인의 뒤를 이어 도시를 건설했던 것이다.


바뇨레죠 건너편 마을, 응회암의 약한 대지 위에 놓여 절벽이 계속 깎여나가고 있다


바뇨레죠는 소멸해 가는 것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무너져 내리는 절벽과 함께 사라져버린 지붕과 벽들, 담장의 일부만 남아 사람의 흔적을 전하는 폐허, 이들은 드넓은 평원의 하얗게 무너져 내리는 경사면과 함께 소멸해가는 것들의 쓸쓸함을 전한다. 흔적만 남은 벽체에 무성한 풀은 인간이 남긴 흔적이 사람의 손을 떠날 때 결국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거스를 수 없는 이치를 보여준다. 골목 끝에 집은 사라지고 대문 자리만 남은 기둥에도 화분을 놓아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이 애달프다.

이미 쇠퇴하고 시들어버린 도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도시가 관광객들로 활기가 넘친다. 동행한 신부님은 “십 년 전에는 이렇게 사람이 많지 않았고 입장료도 받지 않았는데…” 하면서 인파에 놀라워했다. 그러나 이 활기는 거짓 환상일 뿐이다. 사람들이 생활하지 않는 도시, 관광객들만 스쳐 지나가는 도시, 관광객이 사라진 골목길을 들여다보면 적막감이 감돈다.



마을 한쪽 끝에 성 보나벤투라(Santus Bonaventura, 1221–1274)의 생가가 있다. 집은 무너져 내리는 대지와 함께 사라지고, 기둥만 남은 대문 자리에 달아놓은 창살문 너머로 우거진 잡초와 함께 몇 단 남은 계단이 보인다. 성인의 자취도 자연의 파괴적인 힘 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고 싶지만 창살문이 완강하게 앞을 막는다.


다 무너지고 벽체만 남은 보나벤투라의 생가, 왼쪽 벽에 생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바뇨레죠에서 태어난 보나벤투라는 14-15세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학업을 위해 파리로 떠났다. 파리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보나벤투라는 파리 대학의 신학교수 임명을 받는다. 보나벤투라는 취임하기 전 같은 대학의 교수인 기욤과 청빈과 탁발(수도사나 승려가 수도의 방편으로 집집마다 다니며 동냥을 하는 것)을 둘러싼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도미니코회의 토마스 아퀴나스도 보나벤투라와 함께 청빈을 이단으로 모는 기욤의 주장을 논박한다. 한동안 파리의 대학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논쟁에서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욤의 주장을 물리친다.

스콜라학파의 위대한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나벤투라와 동시대에 쌍벽을 이루던 신학자로서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파리 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다. 그러나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회 총장에 뽑히는 바람에 교수 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다.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로서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널리 읽히는 프란치스코의 전기이다.


<에트루리아 문명>


에트루리아는 우리에겐 비교적 낯선 이름이다. 수도원 기행에서 돌아오고 몇 달 후,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라는 이름의 전시회가 열렸다. 여러 나라에서 온 대략 300점의 유물들은 에트루리아 사람들의 생활 모습, 그들의 세계관과 종교관, 사후 관념 등 베일에 싸인 에트루리아 문명의 실체를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조각과 함께 아테네식 물병과 접시가 눈길을 끌었다.

에트루리아는 로마인에 앞서 이탈리아 반도에 최초로 독자적인 문화를 남긴 민족으로, 로마 문명의 근간을 이룬다. 그들은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100년경까지 북으로 토스카나 지방부터 남으로는 로마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면서 화려하고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 언어 등을 남겼다.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원래 지역의 토착민이라는 주장과 소아시아의 리디아에서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 반도에 이주해 온 민족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에트루리아는 그리스처럼 도시국가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지금도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라티움, 캄파니아 등 이탈리아 곳곳에 에트루리아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들은 그리스를 비롯한 지중해의 여러 도시들과 교류했으며, 에트루리아 문명은 고대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화산재가 만든 응회암이 주된 건축 재료였는데, 이 때문에 바뇨레죠처럼 풍화작용으로 무너져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로마인들이 그들을 투스키(Tusci)라 부르고, 그들이 거주한 지방을 투스키아라고 부른 것이 현재의 ‘토스카나’라는 지방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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