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으로 보이는 극단에 대하여
이성, 완전이라는 극단
언어나 단어에는 감정이 있다. 그래서 분명한 뜻을 따져보기 전에 우리는 그 단어가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를 먼저 파악해버린다. 정의를 꼼꼼히 따지는 일보다 곧바로 느껴지는 감정 파악이 보다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누군가에게 '넌 극단적이야'라는 표현을 듣거나 말한다고 해보자.
당신은 그런 '극단'의 범주에 무엇을 두겠는가.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극단적이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대상에게만 사용하고 허용해왔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A라고 생각해.'라는 의견에 '그럼 내가 B라고 말하는 거야?'라고 답하는 비약의 대화방식처럼 A에서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 밑도끝도없는 B와의 연결을 짓는 극단적인 생각.
A를 잘 해내가다가 중간에 고비를 만났을 때, 무너져버리며 모든 것을 한번에 포기하고 마는 극단적인 태도.
그리고 A가 아니라면 절대 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마음.
그런데
극단적이라는 상황에 '이상을 추구하는 마음'을 끼워넣지는 못했다. 왜냐면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나름 긍정적이어 보이곤 하니 말이다.
버드란트 러셀의 삶을 다룬 <로지코믹스>에서 러셀은 완전한 수학적 토대를 찾아나선다. 20년 간의 탄탄한 토대찾기 작업은 수학적 문제는 모두 증명가능하다는 믿음 아래 시작되었으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증명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러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수학을 향한 러셀의 이상 추구는 결국 인생 또한 이론적, 극단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런 러셀이 완전히 이상적인 학교를 만든다. 학생에게 어떠한 규칙도 주지않고 자유를 주었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자식에게조차 자신을 아비가 아닌 선생님으로 부르라고 했으며, 이곳은 집이 아니라 학교라며 강조했다. 그 학교는 결국 망한다.
같은 논리학자인 비트겐슈타인도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는데, 비트겐슈타인은 학생들이 뚱딴지같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두들겨 팬다. 그래서 결국 그 학교에서 쫓겨난다.
러셀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두 극단은 결국 망한다.
극단은 그 자리에 여러 개가 올 수 있다는 여유를 갖지 못하고 하나밖에 놓지 못하는 태도에서 온다.
때묻지 않은 이상 추구, 완벽한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또한 이상이며 이 또한 극단이다.
괴델이 증명했듯 불완전한 것도 토대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나의 20대는 이상적이었다.
나는 그렇게 사는 것을 훌륭하다고 믿었으며, 스스로를 극단적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러셀또한 당시에는 자신이 얼마나 극단적인지를 알아채지 못했고 스스로를 완벽한 이론, 이상을 추구하는 자로 규정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자신의 극단적인 생각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요즘의 나는 중용을 생각한다. 적당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정말 그러한가? 되묻는다.
세상엔 완전한 것보다 불완전한 것이 많으며, 불완전함이 오히려 안정적인 상태, 에너지 레벨이 낮은 상태라고 믿는다.
세상이 완전하려면 너무나 많은 것들이 딱딱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