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텐슈 Dec 31. 2019

배차간격의 역수

불안의 크기

여행을 가면, 그러니까 보통 3박 4일의 해외여행을 가면 여행지에서 돌아오기 이틀 전 밤부터 기운이 가라앉곤 했다.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갈 테고, 단절된 일상으로 돌아가면 여행은 끝이날 거라고 생각하니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미리 아쉬움이 들었다. 여행의 설렘은 인천공항을 가는 길과 비행기를 탈 때, 그리고 여행지에서의 첫날밤에 몽땅 쏠려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2019년에 다닌 여행에서는 그런 마음을 별로 발견하지 못했다.


내신에는 강했고 학점도 좋았지만, 1년에 한 번 보는 시험에서는 약했다. 1년에 한 번 보는 시험은, 다음 버스가 1년 뒤에야 온다. 수능이란 장기전을 겪어본 적 없었던 나는 그런 환경이 불편하기도 했다. 1년에 한 번 보는 시험은 그 하루를 너무나 대단하게 만들었고, 작은 실수도 용납할 수 없게 했다. 백업 자원이 없었다. 오직 시험 점수 100%. 다른 평가영역이 존재하지 않았다. 내신이나 학점은, 최소 1년에 4번의 평가 기회가 있지 않나. 그리고 종종 만회할만한 과제점수도 있고. 그런데 고시는, 그 버스를 놓치면 또 1년을 잘 기다린 뒤,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가기 전에  올라타야 하니까 말이다. 내가 여행을 가서 마지막 날 이틀 전부터 헛헛하고 가라앉았던 것도 가만 보면, 배차간격이 1년이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여행을 꽤 했다. 해외여행뿐 아니라 틈틈이 국내여행도 다녀왔다. 일상과 단절된 여행이 아니라 일상 속에 여행을 넣어 배차간격을 줄였다. 그러니, 여행지에서 늘 느끼던 아쉽고 가라앉던  마음이 금년에는 옅였다.


유후인에서는'두 달 뒤에 싱가포르 또 갈 텐데 뭐.' 하는 마음이 들었다. 두 달 뒤에 또 멀리 여행을 떠날 거라는 일정과 일상에서도 산으로 들로 강으로 떠났던 게  날 괜찮게 만들어줬다.  덕에 여행지에서 매 순간을 하루하루답게 잘 보내고 온 듯하다.


배차간격이 길수록 불안하다. 그리고 그 버스에 집착을 한다. 놓치면 잃는 기회비용이 크니까 말이다. 나는 놓칠까 전전긍긍했다고 지금에야 느낀다.  



정말 버스 얘기로 돌아가면, 집에서 똑같이 강남에 가는 버스 루트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걸어서 10분 거리 정류장에서 배차간격이 1시간에 1대니까 60분이고, 다른 하나는 15분마다 오는 시내버스를 탄 뒤에 갈아타서 강남을 가는데, 그 광역버스는 배차간격은 10분이다. 첫 번째의 정류장에서 여러 번 버스를 놓쳐보고, 버스가 언제 올까 정류장에 앉아 약속시간에 늦을까 불안해하던 나는 이제 별 고민하지 않고 처음부터 두 번째 정류장으로 간다. 거기서 마음 편히 10분마다 올 버스를 의심 없이 기다린다. 편안히 정류장에서 책을 읽는다. 배차간격의 역수만큼 불안하지 않은 거구나! 생각하면서 서울로 가곤 .


할 수 있다면, 반복되는 일이나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은 예측가능성을 높이고 배차간격을 줄여서 안정감이 들게 해야 낫고 이롭다. 그렇다고 생에 늘, 배차간격이 은 일만 일어나진 않을 테고, 나는 또 가끔 오는 버스를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의연하게 기다리는 단련을 해서! 뚜벅뚜벅 의연하게 걸어 나가겠다는 굳은 의지다. 또 골똘히 들여다보아야겠다.



<배차간격>

서울 가는 버스, 여기는 10분마다 저기는 60분.
내신은 두달, 고시는 열두달.

불안의 크기였다.
버스, 육십.
고시, 오십이만오천육백.


매거진의 이전글 삶은 궤도가 아니라 궤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