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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텐슈 Jan 31. 2021

의미 없는 우주에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

왜 사는가 묻거든

인생의 궤적을 그린다면 어떤 모양일까.


내 인생은 막연히 상승세 이겠거니 생각했다. 2차원 평면의 원점으로부터 우상향 하며 뻗어나가는 곡선처럼.

20대에 들어, 실수와 만회를 반복하며 성장이란 걸 해나가면서, 생이란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깔끔한 선형으로 성장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뒤집고 또 뒤집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3차원 나선형 상향 곡선처럼. 


그 후, 철학에서 정반합의 개념을 익히고 생각은 더 복잡해졌다. 이제 상상을 대입할 그래프가 없다. 모르겠고, 깔끔하지가 않다. 그래서 정의하기를 멈췄다. 멀리 보면 나아지고 있으나, 수없이 정반합이 일어나는 것까지만 알겠다. 엎치락뒤치락 생각을 뒤집고, 후퇴했다가 다시 전진했다가 그러다 도약하는 과정을 걸어가며 성장해가겠지, 정도로 말이다.

 

삶의 궤적은 일단 그러하다. 나의 불완전함은 궤적도 어디로 튈지 모르게 만든다. 그래도, 생을 선형의 그래프라고 생각할 때보다, 혼돈 같은 지금의 복잡함이 후련하고 자유롭다.


그러면

도대체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세상에 과연 의미가 선험적으로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찾아가는 걸까. 아니면, 살아가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걸까. 이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고, 연결하는 과정이 삶인가?


2020년, 그 답을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찾아보려 했다. 길가메시는 우룩이라는 왕국의 왕으로, 신은 아니지만 신에 버금가는 영웅이다. 엔키두와 함께 향나무 숲의 훔바바를 무찌르는 모험을 떠난 길가메시는, 그 여정에서 엔키두를 잃고 만다. 엔키두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본 길가메시는 불로초를 구하지만 결국 잃어버리게 된다. 영생을 얻는데 실패한 길가메시가 묻는다. 어찌해야 하느냐고. 그런 그에게 담백하게 말해준다.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고,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맛있는 거 먹고,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살아라.


참으로 간단하지 않은가.


하던 일이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을 때, 우리는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물론 잠깐은 울어야 한다. 감정에 솔직하고 표출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내 받아들이고 돌아가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하하호호 울고, 맛있는 것도 해 먹고,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살면 되는 것.


길가메시의 교훈은, 하늘로 솟던 구름 위의 나의 이상을 현실로 내려다 주었다.

이상은 나를 때우는 연료다. 미지로 향하는 탐험가, 모험가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너머의 세상으로 계속 나아간다. 내가 모르는 거대한 것을 찾아서. 그런 나에게, 길가메시 서사시는, 차분한 명상 같은 글이 되어주었다. 무려 5,000년 전에 써진 이야기인데, 그때도 지금 시대의 인간처럼 죽음을 생각하고 두려워했다는 점이 익숙한 듯 낯설다. 유한한 삶의 의미를 탐구한, 그 시절 그들의 답이 저것이다.


거창한 삶의 의미 찾기, 자아 찾기를 내려두고 나는 오늘에 집중한다. 한동안 길가메시의 교훈을 음미했다. 말 그대로, 친구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가지고, 맛있는 것을 먹고, 궁금한 것을 찾아보고, 궁금한 곳을 찾아가고, 의미 있는 일을 했다.

그런데 자꾸만 의미를 쌓고 싶어 진다. 다시 또 거창한 의미를 갖고 싶어 진다. 의미가 현실에서 이상으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럴 때 우주를 생각한다.

우주의 생성에는 계획이 없다.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내지 않았고, 누군가 알고리즘으로 프로그래밍해서 돌리는 세상도 아니다. 물리법칙도 우주의 의도를 말해주기보다 해석일 뿐이다. 의미가 없어도 괜찮은 세상이다. 원래 우주는 그러니까. 그래도 또 찾고 싶다. 의미를.


이런 의도 없는 우주에서 의미 없는 반복이 우리의 삶을 심심하게 할지라도, 이 의미 없음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자가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 빅터 프랭클도 왜 사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곤경도 버텨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왜 사는지를 안다는 건, 의미 없이 만들어진 세상에서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닐까.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말했던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의미 없는 우주를 알려주신 교수님께 여쭤보았다.

의미 없는 우주에서 교수님은 의미를 발견하셨나요? 

나의 질문에 교수님은 사랑을 답해주셨다.  


사랑.

당황스러웠다. 사랑.

내가 생각한 의미라는 건, 또 이런 식이었다. 평생에 걸쳐 풀고 싶은 질문, 연구주제 따위. 그런데, 교수님의 대답은, 사랑인 것이다. 그날의 답변은,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받은 충격과 버금갈 만큼 묵직했다. 기존의 나의 것을 무효화하는 힘.


사랑이라니.

사랑이었다.


그만 묻고 집으로 돌아가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맛있는 거 먹고,

멋진 남자와 사랑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살아라.


결국, 나는 적극적 묻기를 그만두고 일단 마음 가는 대로 지내보기로 했다. 혼란스러울 때는 혼란한대로. 밤하늘의 별과 달을 올려다보고, 석양이 지는 때에 걸으면서. 의미를 알아채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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