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채로운의 시작>

by 다채로운

나는 그림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1 정도까지는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고2, 고3이 되면서
미술 수업을 함께 듣던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게 됐다.
그 친구들은 정말 예술가 같았다.
테크닉이 대단하지 않아도,
내가 상상도 못 한 감각을 가졌다.


하지만 나는 수학, 과학도 잘했다.
그래서인지 “예술로 전공하진 않겠지”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조금은 씁쓸했지만,
그 친구들을 보며 ‘예술은 타고나는 재능이구나’ 하고 넘겼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졸업할 때 내가 우리 학년에서 가장 높은 미술 점수를 받아
Visual Arts Award를 받았다는 거다.

그런 상을 받았음에도, 딱히 생각이 바뀌진 않았다.

모든 프로젝트에서 선생님이 원하는 걸 정확히 그려내고,
미술 역사 시험은 거의 만점.
그냥 ‘점수 잘 받는 모범생’이었다.


“그림은 전공할 수 없어. 취미로 가져야지.”
“좋아하는 걸 일로 하면 스트레스받아.
그럼 순수하게 좋아하는 게 사라지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래서 공대로 갔다.


하이스쿨 선생님들은 공대가 수학, 과학, 미술이 합쳐진 곳이라고 했다.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속았다.
그래도 뭐… 선생님들도 공대를 다녀본 건 아니니까.
몰랐겠지. 원망하진 않는다.

그냥, 내가 상상한 것과는 조금 달랐을 뿐이다.
조금 고생했지만, 그래도
공대에서 짤리지 않고 끝까지 다녔다.


그렇게 나는
그림과 점점 멀어졌다.
공대에 가니 연필을 잡을 시간이 없었다.
일을 하게 되었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시간이 더 없었다.

(도대체 아이 낳기 전 그 많던 시간에 나는 뭐 했을까?
아직도 미스터리다.
분명 그때도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흘러
그림을 다시 그리려 했지만,
빈 종이가 무서웠다.


그리긴 하고 싶은데 손이 안 간다.
시작만 하면 될 텐데- 그게 참 어렵다.


손이 굳었고, 머리도 굳었다.
뭘 그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아마 마음도 굳은 거겠지.


글이든 그림이든,
무조건 시간을 들여 연습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는 게 가장 큰 핑계였다.
(아니, 사실 시간은 진짜 없긴 하다.)


그래도 최근엔 마음을 다시 잡았다.
“은퇴하면 그림을 다시 그려야지.”
그 마음을 지금부터 실행하기로 했다.


지금 안 하면,
은퇴해도 안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상상만 하지 않고
진짜 실행에 옮겼다.


귀여운 일러스트를 따라 그려보고,
푸드 일러스트 다이어리도 만들어봤다.
이젠 디지털 드로잉도 독학 중이다.


다시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을 때,
친구가 말했다.
“색은 꼭 칠해서 완성시켜. 끝까지 가야 해.”

그래서 잘 못 그려도
일단 색칠까지 하기로 했다.
그건 ‘완성’보다
‘감정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세상 다 잊고
이런 딴짓만 몇 시간이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워킹맘이니까,
그럴 순 없다.


그래서 훗날,
‘은퇴한 나’를 위해 지금부터
손 근육과 마음 근육을 조금씩 훈련 중이다.

은퇴 후에는,
풀타임으로 작정하고 프로 딴짓러가 될 테니까!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다.
글이든, 그림이든,
내 안의 무언가를
밖으로 꺼내고 싶어 하는 사람.


오늘도 남는 시간에 이것저것 해본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매일 다 하진 못하지만,
되는 대로 한다.


글이든 그림이든,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이미 create 하는 중이니까.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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