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의 시작>
감수성은 타고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큰 감정의 그릇을 타고났다고 믿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음이 바싹 말라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타고나는 게 아니었나?
가꾸지 않으면 메말라 버리는 거였나?
아예 잃어버린 걸까?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어른인 나’, ‘엄마인 나’를 잠시 뒤로하고
어릴 적 내가 좋아하던 것들부터 다시 돌아보기 시작했다.
드라마, 소설, 만화책.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바깥세상이 안 들릴 만큼 볼륨을 올려본 게 언제였을까.
밤에는 혹시 아이들이 우는데
그 소리를 내가 못 들어서 더 울릴까 봐,
낮에는 혼자 걷다가
혹시 자동차 소리를 못 들어서 사고가 날까 봐,
늘 음악을 조심스레 듣던 나였다.
볼륨을 줄이거나,
한쪽 귀만 꽂거나,
아니면 그냥 아예 듣지 않던가.
그래서 다시 시작했다.
아이들을 재운 밤,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노래 한두 곡이라도 내 머릿속과 마음속을 가득 채운다.
그렇게 하다 보니,
조금씩 ‘느끼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감수성은 다시 배울 수 있는 감각인 것 같다.
잊고 있던 감정의 회로를 천천히 깨우는 일,
그게 요즘의 나다.
이제는 일부러 느끼려 한다.
하늘의 색을 유심히 보고,
따뜻한 커피 향을 오래 맡고,
아이들이 웃을 때 그 표정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본다.
그 짧은 순간들이 나를 다시 ‘살아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예전에는 감정을 기록할 틈이 없었다.
지금은 하루를 마치기 전에
노트 한 장을 꺼내어 적는다.
그럴 여유가 없으면
그냥 핸드폰 노트 앱에 끄적끄적.
길게 쓰지 않는다.
억지로 꾸며 쓰지 않는다.
그냥 간단하게, 부담 없이.
그 단순한 기록이 내 마음의 온도를 지켜 준다.
이렇게 나는 글을 읽고, 글을 쓰며,
조금씩 다시 ‘느끼는 법’을 연습하는 중이다.
문장 하나를 고르고, 단어를 바꿀 때마다
마음의 결이 달라지는 걸 느낀다.
하루를 적어 내려가며
내 안의 작은 진심과 마주한다.
감수성을 다시 배운다는 건,
세상을 예전보다 느리게,
조금 더 섬세하게 살아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스쳐 지나가던 마음을 붙잡는 일.
그렇게 하루하루,
나는 다시 ‘느낄 줄 아는 나’로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