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의 시작>
하이스쿨 12학년 때 처음으로 들은
‘엔지니어’라는 직업.
수학과 과학, 그리고 미술을 좋아하던 나에게
선생님들은 말했다.
“너는 엔지니어링이 잘 맞을 거야.”
그 말에 응시원서를 넣었고,
그렇게 토론토 공대에 합격했다.
음… 선생님들에게 속은 것 같은 기분은 들었지만,
어찌어찌 졸업은 했다.
다른 분야에서 일해보고 싶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벗어나지 못한 채 엔지니어로 일하다 보니
어느새 대학을 졸업한 지 20년이 다 되어 간다.
으으…. 징그러! 20년이라니.
어릴 적엔 소설도, 만화도, 애니메이션도 좋아했다.
하지만 대학에 가면서 그런 시간은 사라졌다.
감정을 쓰는 여유도,
감탄할 에너지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감성이 메말라가다가
나는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자 또 시간이 더더더더욱 줄었지만,
아이와 함께 지내며 새로운 감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감정들은 어릴 적처럼 몽글몽글하진 않았지만,
아이들은 내게
다시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무한한 사랑! 무한한 행복! 그리고 가끔 너무 어이없는 빡침까지!)
그래서 결심했다.
감수성을 되살리기 위한 연습으로
다시 만화를 보고, 책을 읽고,
끄적끄적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내 시간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고,
그건 어쩌면 시기적으로도 딱이었다.
처음엔 어려웠지만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내 안에 갇혀 있던 몽글몽글함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다.
한글과 영어, 두 언어 사이에서 글을 쓰는 건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 시간 자체가 나를 자유롭게 만든다.
낮엔 여전히 이런저런 공사 도면과 시공서를 보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고, 좋은 글귀를 찾아 책을 읽는다.
파워 T들이 많은 공돌이들 사이에서 일하느라
가끔은 그런 내 모습이 유난스러워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두 모습 중 하나를 택할 필요는 없다는 걸.
나는 늘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누가 봐도 이과지만,
누가 봐도 전형적인 이과는 아닌 사람.
미술과 음악,
글과 언어를 유난히 사랑하는 이과.
그 두 세계가 공존하는 이 자리에서
비로소 나는, 나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