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land on Ireland - 003
6년 전 처음 아일랜드에 도착했을 때, 첫날은 모든 것이 정신없기만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니느라 오히려 정신이 없었다. 첫 해외 방문이라 모든 게 낯설었지만 당장 생존이 급했기 때문에 한숨 돌릴 여유가 없었다. 숙소 도착하자마자 짐만 두고 나가서 핸드폰을 개통하고, 인터넷에서 본 집 주인들한테 전화를 하고, 바로 연락 닿는 집 몇 곳에 버스를 타고 보러갔다 왔다. 그렇게 여기가 아일랜드라는 걸 깨달을 새도 없이 바쁘게 첫날을 보내고 밤에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갈매기 울음 소리에 잠에서 깼다. 꼬끼오~ 하는 닭 울음소리도 아니고 끼룩 끼룩 갈매기라니! 그제서야 내가 먼 나라 아일랜드에 와 있다는 게 확 실감이 났다. 온통 낯선 억양의 영어만 귀에 들리는 것보다, 동양인이 거의 보이지 않는 길거리보다 더 이국적으로 느껴진 것이 바로 이 갈매기 소리였다. 그 이후로도 더블린에서 호스텔을 전전하며 지내는 동안에는 매일 아침 기상을 갈매기 소리와 함께 했다. 그뒤 더블린 카운티의 루칸이라는 작은 도시로 이사가고 나서부터는 아침 갈매기 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난 아일랜드에서 만났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한 뒤 신혼여행으로 이곳에 다시 와 있다. 도착 첫날엔 긴 비행을 마치고 밤 9시가 되어서 겨우 호텔 체크인을 하고 뻗어버렸다. 그리고 찾아온 아침... 잊고 있던 갈매기 소리가 나를 깨웠다.
끼룩~ 끼룩끼룩 끼~룩
그제야 다시 실감이 났다.
내가 더블린에 와 있다는 게.
우리는 아일랜드에서 처음 만났다. 둘이 함께한 추억도 있지만 각자만의 아일랜드에 대한 추억도 많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아일랜드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그렇게 잊혀지는 일 없게 아일랜드에 대한 기억을 꾸준히 불러왔었지만 그래도 놓친 부분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아침 갈매기 소리고, 또다른 큰 한가지는 매서운 바람과 비가 함께 내리는 거지같은 날씨다.
좋은 기억은 선명하게, 안 좋은 기억은 흐릿하게 남는다고 하더니...아일랜드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좋았던 것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정작 당시에도 날 힘들게 했던 거지같은 날씨를 잊고 있었다. 보통은 우산 없이도 어느정도 맞고 다닐 수 있는 비와 바람이 부는데, 종종 진짜 미쳤나 싶을 정도로 날씨가 엉망일 때가 있었다.
이번 신혼여행도 첫날, 둘째날 비와 바람이 무척 지저분하게 내렸다. 한국보다 따뜻한 옷차림을 챙겨오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가져온 옷 중 반은 너무 얇아서 여행 중에 못 입을 옷이 됐다. 넣을까 말까 했던 겨울 코트와 두툼한 니트를 껴 입어도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다.
우리 둘다 결혼식을 치르고 밤을 거의 꼬박 새우다시피 한 뒤, 곧바로 장시간 비행을 하고 온 거여서 심신이 지쳐있었다. 게다가 아일랜드 도착한 초반에는 시차적응도 다 안 됐을 때니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그런데도 심지어 둘다 아일랜드에서 가보고 싶었던 곳이 많아 욕심을 부리느라 첫날, 둘째날은 정말 고단하게 보냈다.
특히 둘째날은 아일랜드에서 신혼여행을 한 약 10일간의 시간 중에 가장 날씨가 최악인 날이었고, 우연찮게 우리가 가장 빡빡하게 많은 일정을 강행한 날이기도 했다. 아침부터 해리포터 촬영지인 트리니티 칼리지 구 도서관에 갔는데, 입장 전에 밖에서 줄 서있는 동안 이미 비바람을 세차게 맞아서 그때부터 녹초가 되어 있었다. 기온 자체가 한국보다 낮아서 춥게 느껴지는데다가 거센 비바람까지 맞으니 갑자기 한겨울에 온 듯한 추위를 느끼며 다녔다.
그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교외의 쇼핑센터, 내가 살았던 근교 도시의 집까지 갔다오는데도 비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게다가 난 오랜만에 내 추억의 장소에 간 거여서 가능하면 한 곳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고 싶었는데, 그 이후로도 일정이 더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더블린 시내에 돌아와야해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은 상태였다.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 비가 그쳐있었지만 다음 약속이 있어서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다시 나와야 했다.
이렇게 하루종일 날씨로 인한 피로와, 빡빡한 일정에 대한 아쉬움이 쌓이다보니 너무 속상했다. 마지막 일정 가기 전 호텔에 잠시 들렀을 때 얘기를 꺼냈다. 우리 남은 일정은 여유있게 보내는 게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꺼낸 얘기였는데, 둘다 비비람에 지친 상태다보니 싸움이 됐다. 그날의 마지막 일정은 마침 워킹홀리데이로 아일랜드에 와 있는 친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둘다 싸움을 급하게 정리하고 완전히 화해되지 않은 상태에서 친구를 만났다.
막상 우리가 너무나 좋아했던 펍에서 맛있는 맥주와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아침부터 무려 5가지 일정을 소화한 뒤 늦은 밤 호텔에 돌아왔다.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이며 샤워를 하는데, 그 뜨거운 물에 이날 하루의 안 좋았던 기억이 싹 씻겨내려가는 듯했다. 좋았던 기억은 선명하게, 안 좋은 기억은 흐릿하게 남는다더니, 그날 하루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샤워하는 도중에 돌이켜보니 좋았던 기억들만 떠오르고 ‘오늘 참 재밌었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상했다. 그날 하루종일 춥고 힘들고 순간순간 아쉬움이 가득했었는데, 하루가 다 지나고 보니 그런 안 좋은 기억과 감정이 정말 흐릿해져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행히 그날 이후로는 더블린의 날씨가 많이 괜찮아졌고, 우리도 기존 계획 중 몇가지를 취소하며 여유있는 시간을 보냈다. 첫날, 둘째날에 아일랜드에서도 보기드문 거지같은 날씨를 겪었다보니, 그 다음부터는 모든 다른 날씨에 감사하게 됐다.
“춥지만 비가 안 와서 너무 행복해”
“비가 와도 바람 안 불고 포근하니까 너무 좋다”
그날 그 유난히 거지같았던 날씨와 빡빡했던 일정 덕분에 우리는 남은 여행기간 동안 행복함과 감사함을 더 쉽게 느끼게 됐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벌써 여행한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다. 지금까지는 그때처럼 안 좋은 날씨가 없어서 너무 좋았다.
앞으로 여행이 끝나서 한국에 다시 돌아가고 1년, 2년, 3년 시간이 흐르면 난 또 그 거지 같은 날씨를 잊게 될까?
날 깨우던 갈매기 소리를 비롯한 작은 기억들, 굳이 붙잡으려 애쓰지 않을 소소한 기억들을 또다시 잊고 살게 될까?
다음 5년이 흐른 뒤에 내가 아일랜드에 대해 기억하고 있을 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I'll land on Ire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