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land on Ireland - 005
6년 전 아일랜드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오랜 연애 끝에 이번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운좋게 신혼여행으로 아일랜드에 다시 갈 수 있었다.
우리 둘 모두 아일랜드에 대한 각자의 추억을 상대에게 공유하고 싶은 마음도 컸고, 이전에 각자 해보고 싶었는데 해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던 것들도 많았다. 그래서 가고 싶은 곳을 모두 나열해보니 엄청나게 많은 리스트가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많은 것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의 일정표는 빽빽하게 짜여지게 됐다. 무리해서라도 다 다니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물론 이렇게 짜둔 일정표가 전부 실행 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의 여행이 아무 변수 없이 계획했던 대로 순탄하게만 흘러갔다면 말이다.
아일랜드에 도착한 후 첫 이틀 동안은 비바람이 거지같이 불었다. 이튿날 저녁, 현지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지내는 친구를 만나 식사를 하는데 미처 몰랐던 소식을 들었다. 주말에 허리케인이 온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마침 주말에 둘린이라는 해안 마을과 이니시모어라는 섬에 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허리케인이라는 단어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말을 들은 당일, 이미 우리는 최악의 날씨에 쉴틈 없는 일정을 소화하며 몸과 마음이 지친 나머지 이미 한바탕 싸움을 한 후였다. 그날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잠들기 전, 우리는 허리케인과 우리 두 사람 컨디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일기예보를 보니 비가 아예 안 오는 날을 찾기 힘들었다. 그 결과 원래 더블린에 머무는 동안 호스, 브레이, 달키 이 세 곳을 다 당일치기로 갔다오기로 했었는데 호스 한곳만 가는 것으로 일정을 조정했다.
브레이는 6년 전 우리가 아일랜드에서 사귀던 짧은 시간 중에 당일치기 데이트를 다녀온 곳이다.
달키는 영화 원스 촬영지로, 내가 한번도 못 가본 그만의 추억의 장소다.
호스는 6년 전 우리가 다른 친구와 함께 셋이 놀러갔던 곳이다. 그때 내가 첫 주급 받은 기념으로 피쉬앤칩스를 샀었다. 이번에 6년만에 다시 간 호스에서 그 똑같은 피쉬앤칩스 가게에 다시 갈 수 있었다.
브레이와 달키를 못 가게 된 건 아쉬웠지만, 대신 어딘가를 많이 가야한다는 압박감이 없어지니 여행할 때 한결 마음이 편하고 지금 머무는 이 장소 자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우리는 호스의 아름다운 항구 구경을 하고, 6년 전 먹었던 피쉬앤칩스를 다시 먹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예쁜 티룸을 발견하여 정말 좋은 시간을 보내고, 거기서 우리 결혼식 입장곡을 우연히 들어서 우리만의 율동도 췄다. 원래는 산책로도 걸었어야 했지만 날씨가 안 좋아져서 과감히 포기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넷째날이 지나갔다.
다섯째날은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브레이나 달키를 가는 대신 하루종일 푹 쉬기로 했다. 쉬면서 같이 영화를 보자, 맛집에서 점심을 먹자 등등의 얘기를 나눴었는데..그날 아침이 밝기 전 새벽, 내 배에 탈이 났다. 짧은 시간동안 화장실에 세번을 갔다.
마침 쉬기로 했던 날이라 다행이라 해야할지, 아니면 오랜만에 푹 쉬며 에너지를 채우고 싶었는데 힘들게 배앓이를 하게 되어서 불행이라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침 식사는 호텔 앞 편의점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샌드위치를 먹기로 정해놨었는데, 난 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남편이 나가서 내 몫의 스프와 샌드위치까지 사다주어서 우리는 방에서 아침을 해결했다.
그날은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비워놨었는데, 창밖을 보니 그냥 계속 맑았다. 그렇게 날이 좋을 수 없었다. 심지어 잠시 밖에 나갔다온 남편은 포근하다고까지 했다. 아일랜드에 온 이후 비와 바람이 없던 날이 없었는데, 이렇게 좋은 날 방에만 있을 순 없었다. 어떻게든 나아서 돌아다녀야 했다.
늦은 오후까지 최대한 방에서 쉬며 회복한 다음, 해가 지기 전에 밖으로 나갔다. 이전에 비와서 아쉬웠던 세인트 스티븐스 그린에 다시 가고, 오스카 와일드 동상도 보고, 그 주변을 걸으면서 색색깔 문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가보고 싶었던 카페도 가고 밤 산책도 했다. 보기드문 더블린의 맑은 날을 만끽해서 너무 좋았다. 비록 늦은 오후부터 저녁까지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맑을 줄 몰랐던 날이었기에 더 깜짝선물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배앓이는 쉽게 낫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여행 거의 막바지까지 조금씩 계속 됐다.
이번 여행 또 다른 큰 변수는 더블린 밖에서 생겼다. 우리는 주말에 둘린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가서 2박을 하며 마을 구경과 클리프 모허 구경을 하고, 그 다음에는 아란 아일랜드에 가서 1박을 할 예정이었다.
둘린에서 마을 구경을 하고 1박을 한 것까지는 순조로웠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 평화로운 조식 시간에 예고 없이 찾아왔다. 남편의 메일함으로 아란 아일랜드 가는 페리가 취소 됐다는 안내가 왔다.
걱정했던 허리케인은 이미 지나간 뒤여서 취소될 거란 생각은 전혀 못하고 방심하고 있을 때였다. 그 메일을 받은 날 당일은 화창하고 좋았는데, 하필 우리가 섬에 들어가는 날과 나오는 날 날씨가 안 좋아서 운행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메일을 받는 순간 머리가 지끈했다. 바꿔야할 게 한 둘이 아니었다.
우리가 가려던 아란 아일랜드의 이니시모어는 유럽의 서쪽 끝으로 불리는 곳이다. 그 섬 서쪽 끝 해안에 서면 정말 바다 저 끝에 낭떠러지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다. 남편은 예전에 친구와 가봤고, 나는 못 가본 곳이라 전부터 남편이 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한 곳이다.
하지만 못 가게 된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이 빨리 다음 대안을 찾아서 교통편과 숙박을 정리해야 했다. 이니시모어 섬에 아예 못들어가니까 그쪽 숙소에는 무료 취소 요청을 했는데, 문제는 그럼 이니시모어 대신 어디서 하룻밤을 잘 것인가였다. 둘린은 2박이면 충분했다. 하룻밤 더 묵으며 할 게 없었다. 더블린에 하루 일찍 가기엔, 이미 우리가 예약한 호텔이 그날 방이 없어서 하루 추가 예약을 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둘린과 더블린 사이 경유지인 골웨이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골웨이는 우리의 이번 여행 계획에 없던 곳이었다. 나는 6년 전 아일랜드 워홀 당시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 크리스마스에 골웨이에 간 적 있었다. 그때는 크리스마스여서 온 가게와 펍, 투어가 다 쉬고 거리도 온통 사람 없이 조용했었다.
이번 신혼여행에 골웨이에 갈때도 큰 기대는 없었다. 그냥 ‘골웨이는 오이스터(굴)+기네스 조합이 유명하다던데 한번 먹어보자!’가 우리의 유일하고 작은 기대였다.
10월의 골웨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수도인 더블린과도, 시골 마을인 둘린과도 다른 매력이 있었다. 시내를 한바퀴 둘러본 후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오래된 펍에 갔다. 그곳에서 해산물 플래터와 굴, 기네스를 시켰다.
사실 한국에서 굴을 많이 먹어봤기 때문에 굴+기네스 조합에 큰 기대를 안했다. 오히려 약간 이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막상 먹어보니... 요리왕 비룡 효과음이 절로 스쳐가는 환상적인 맛이었다!!!
신선한 굴에 레몬즙과 뭔지모를 흰 소스를 얹어 먹고 거기에 기네스 한 모금이면 정말 천국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기네스가 해산물과 이토록 잘 어울리는지 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골웨이는 아예 안 오려고 했던 곳인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게 돼서 이런 새로운 맛을 알게 되다니! 이번 여행에서 얻은 뜻밖의 성과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좋은 줄 알았던 게 알고보니 나쁜 걸로 이어지고, 안 좋은 줄 알았던 일이 결과적으로 좋은 일을 불러오는 게 참 신기하고도 재미있다.
이렇게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 게 여행의 묘미 같다. 그리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 오히려 마음껏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것도 일상생활이 아닌 여행이기에 더 쉽게 가능한 듯하다.
예상보다 추운 날씨 때문에 예쁜 옷 입고 셀프 스냅을 남기자던 목표 대신 칙칙한 코트와 바람막이를 뒤집어 쓰고 다니고, 소매치기 무서워서 사진 많이 찍어야겠다는 다짐도 지키지 못했다. 전세계 배송 된다는 안내판을 보고 들어간 가게에서 선물을 잔뜩 골랐는데, 한국엔 배송이 안 된다고 하여 양손 무겁게 낑낑 들고가기도 했다.
이처럼 이번 여행엔 글에 다 담지 못한 크고 작은 변수가 참 많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변수가 생기면 재빨리 다른 대안을 찾아서 남은 여행을 이어나가는 수밖에.
때로는 그래서 여행이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음 여행엔 또 어떤 변수가 기다리고 있을까?
벌써 다음 아일랜드 방문 계획을 세우고 싶다. 아직 기약은 없지만.
I’ll land on Ire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