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화보(Lifegraphy)를 담는 라이프그래퍼(Lifegrapher)
우리 외갓집은 시골에 있다.
지금은 많이 발전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외갓집에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있을 때부터 시골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나에겐 시골이라는 표현이 익숙하다.
우리 외삼촌은 외갓집 오남매 중 셋째, 1남4녀 중 1남을 맡고 있다.
자라면서 우리 엄마를 포함한 형제들이 모두 서울과 전국 각지로 떠나는 동안 삼촌만이 유일하게 외갓집을 지켰다. 참 사람 좋고, 사람을 좋아하는 우리 외삼촌은 다 커서 연락도 잘 안하는 조카(나)에게 가끔 서운하다고 이야기 하곤 했다. 내 마음의 고향은 우리 외갓집이기 때문에 나도 늘 그곳에 가고 싶었지만 바쁘게 지내는 동안에는 주말에 1박2일로 그곳에 다녀오는게 약간은 무리였다.
2019년 4월, 사진학원 종강을 하고 자유 시간이 생겼을 때 가족 중 가장 먼저 우리 외삼촌네 식구들을 담고 싶어서 외갓집으로 향했다. 갑자기 전화해서 '저 이번 주말에 가도 돼요?'라고 묻는 나에게 외숙모는 흔쾌히 괜찮다고 해주셨다.
외갓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 주말에 우리 엄마와 외삼촌, 이모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체육대회가 있었던 것이다.
동문 체육대회여서 재학생들은 물론 졸업생들까지 기수별로 참가하는 체육대회였다.
우리 엄마가 다녔던 초등학교라는 건 늘 차타고 지나가면서 힐끗 얘기 들었던 게 전부였다.
그 학교는 우리 외할아버지도, 우리 외삼촌의 아이들도 다닌 곳이었다.
당시 외삼촌네 둘째가 6학년, 셋째가 3학년이었다.
이렇게 뜻밖에 나는 우리 외갓집 식구들 3대가 다닌 초등학교의 체육대회에 가볼 기회가 생겼다.
그날 이른 아침, 외삼촌은 체육대회 준비로 이미 아침 일찍 학교에 간 뒤였다.
나는 귀여운 사촌동생을 따라서 학교에 갔다.
사실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체육대회를 떠올리고는, 가족들이 오순도순 모여앉아 경기를 구경하고 응원하는 모습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삼촌은 삼촌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같은 기수/학년의 친구들이 있었고, 외숙모도 봉사활동 부스에 계셨기 때문에 다들 따로따로 체육대회를 즐기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처럼 혼자 남게 된 나는 어슬렁어슬렁 학교를 산책하고 그때그때 가족들을 따로따로 찾아가서 말 그대로 제3자, 이방인처럼 구경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벌써 한~참 된 나에게 학교 산책 자체가 참 오랜만이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학교들의 비슷비슷한 모습과 분위기가 있어서 옛날로 돌아간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다가 나는 우리 외삼촌이 있는 부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기억 속 삼촌의 가장 어린 시절은 머리를 살짝 기르고 기타를 치던 젊은 청년의 모습이다.
외갓집에 놀러갈때면 나와 내 동생은 어두컴컴한 삼촌 방에 가는 걸 좋아했다. 삼촌 방에는 창문이 있을 법한 위치에 야외로 나가는 창호지 문이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아도 창호지를 통해 바깥의 햇빛이 은은하게 들어와 왠지 아지트같은 느낌이 났다. 재떨이와 담배꽁초, 자그마한 TV, 화장을 짙게 한 배우들이 나오는 중국 영화 비디오, 기타와 노래책들은 우리에겐 마냥 재미있는 '삼춘'의 물건들이었다. 방 한켠의 좁은 문을 열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고 그 위엔 아담한 다락방이 있었다. 그곳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던, 우리 엄마와 이모들과 삼촌의 물건들이 있었다. 이모들이 어린시절 봤다는 책들의 그림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삼춘 방'은 어린 우리에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너무나 매력적인 탐험 장소였다.
젊은 청년이던 삼촌은 우리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주고 가끔은 노래책을 펼쳐서 기타도 쳐주었다. 우리가 놀러온다고 하면 호호아줌마나 곰돌이푸 같은 어린이 만화영화 비디오를 잔뜩 빌려다주었다. 외갓집 마당에 어린이 3명이 들어가고도 남는 아주 큰 대야를 꺼내서 물을 받아 물 놀이도 하게 해주고, 외삼촌이 태어나던 해 심었다던 커다란 단풍나무에 그네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밤이면 별 보러 가자고 데리고 나가 별자리들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삼춘은 우리의 동심지킴이였다.
2019년 4월의 체육대회에서,
나는 우리 삼춘의 더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았다.
중년의 삼촌은 어느새 아이가 셋이다. 첫째는 벌써 고등학생, 막내도 10대이다.
외갓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해 총 7식구를 책임지는 가장이다.
늘 든든한 어른처럼 보였던 우리 삼춘이,
그 체육대회에서 만큼은 어린 아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렇게 해맑게 어린 아이처럼 웃는 삼촌의 모습은 그때 처음 보았다.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한바탕 경기를 하고, 웃고, 떠들고, 응원하고, 상대 편에게 야유도 하는 모습은 낯설지만 따뜻했다. 우리 삼춘과 친구들의 유쾌한 에너지가 나에게도 전해졌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불 피우며 고기를 굽고 소주 한잔을 하는 모습을 보면 완전히 아저씨 같지만, 허울 없는 오랜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 서있는 우리 삼춘의 맑은 표정은 영락없이 앳된 소년이었다.
나는 관찰자이자 이방인이 되어서 우리 삼춘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흐리던 하늘이 점심 시간이 지나면서 하늘이 점차 맑아졌다.
나는 다음 일정을 향해 가야했다.
체육대회가 한창이던 그 시간에 나는 각자 따로 떨어져 있는 외삼촌, 외숙모, 사촌동생들을 한명한명 찾아가 작별인사를 하고 외갓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의 체육대회로부터 벌써 일년 반 가량이 지났다.
코로나가 오래 지속된 지금 이 사진을 다시 보니 마스크를 안 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 낯설다.
다시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내가 직접 보러가지 않아도,
우리 외갓집 3대가 다녔던 이 초등학교에서 체육대회가 열리고,
사람들이 모이고, 우리 삼춘은 친구들과 또다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평범하고 소중한 일상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그날, 나의 동심지킴이이자 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우리 삼춘의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들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젊은 청년 시절의 삼촌과, 지금의 중년의 모습인 삼촌, 그리고 내가 본적은 없지만 생생히 볼 수 있었던 소년의 삼촌을 모두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 삼춘의 소중한 추억이 사촌동생들의 추억으로 이어지고, 이렇게 소중한 삶들이 계속되길 바란다.
사랑하는 공간에서 사랑하는 일상을 담다
보통 사람들의 손때 묻은 생활공간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일상의 모습을 사진, 영상, 글, 소리로 담고자 하는 라이프그래퍼(Lifegrapher) 단비입니다. 브런치에서는 일상화보(Lifegraphy)를 담으며 느꼈던 생각을 글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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