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화보 전문 라이프그래퍼(Lifegrapher)를 꿈꾸는 단비입니다.
새 직장에 입사하고 딱 3개월 지났던 작년 7월, 새로운 꿈이 나에게 찾아왔다.
어느날 갑자기였다. 한번도 직업으로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적 없었던 일로 직업을 바꿔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전혀 뚱딴지 같은 결심은 아니었다.
몇년에 걸쳐 떠올렸던 생각의 조각들이 하나둘 모여 뜻밖의 퍼즐 그림을 완성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공간에서
사랑하는 일상을 담다
보통 사람들의 손때 묻은 일상 공간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일상의 순간을 영화 스틸컷처럼 연출해서 담아주는 일. 그리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브랜드를 내손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꾸려가는 일.
내가 새롭게 꿈꾸는 일이다.
처음 이 생각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왠지 모르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럼 사진 작가가 하고 싶은거야?"
라는 질문을 들으면 난처했다. 나는 사진 작가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작가'라는 단어는 내가 지향하는 정체성과 거리가 멀었다. 거창한 이름이었다.
나는 도대체 한마디로 뭐가 되고 싶어하는 걸까? 명쾌하게 정의하지 못했다.
다시 4개월 뒤, 사진 전문 과정 수업을 등록하고 퇴사를 했다.
마침 그때 만났던 한 어른은 애정과 걱정이 동시에 담긴 말투로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뭐가 되려고 하는 걸까. 허허~"
그리고 이때만해도 그저 "영세 상인이요. 하하~" 라고 답했다.
퇴사 후 사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어느날 문득 라이프그래퍼(Lifegrapher)라는 명칭이 떠올랐다.
원래 포토그래프(Photograph; 사진)는 빛을 의미하는 Photo와 그림을 의미하는 Graph의 합성어로,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나는 사진을 메인 도구로 사용하더라도, 영상/360도 영상/소리/글 등 다양한 매체를 융통성 있게 같이 활용하고자 하기 때문에 '사진'에 한정된 포토그래퍼라는 명칭이 나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신 내가 담고 싶은 건 사람들의 일상이니까. 인생/삶/생활이라는 뜻을 지닌 라이프(life)를 포토(photo) 대신에 붙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이상하게 너무나 딱 맞는 명칭으로 느껴졌다. 나한테 잘 맞는 옷을 찾은 것 같았다.
사진/영상/글/소리 등 여러 매체로 사람들의 일상을 담는 사람.
라이프그래퍼 단비
나이 서른에 직업을 바꾸고자 하는 무모한 나를 위해, 나의 앞날을 위해 내가 직접 붙인 새로운 이름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적합한 이름을 찾았을 뿐인데 내 꿈과 한발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관심사를 지니고 있다. 화장품, 강아지, 레트로 제품, 축구, 맥주, 영화 등등...
내 (얕은) 관심사는 사람, 인생, 보통 사람들의 사는 모습, 사람 사는 세상이다.
(나는 뭐 하나 깊이 좋아하는 법이 없다. 뭐든지 얕고 넓게 다양하게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예쁠 수 없다.
(만나면 하도 칭찬을 많이 해서 내 친구들은 나를 칭찬머신이라고 불렀다. 내 눈엔 예뻐보여서, 장점이 잘 보여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이었지만 친구들은 부끄러워했다)
어릴 땐 내가 단지 미디어(컴퓨터, TV 등)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와서 보니 미디어가 세상을 비추는 창이기 때문에, 나에게 더 재밌게 느껴졌던 것 같다.
고등학생 때 집에서 버스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학교로 통학했는데, 매일 아침 학교 가는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사람 구경을 했다. '저 사람은 어떤 사연이 있어서 이 시간에 저런 모습으로 저렇게 가는 걸까'. 이렇게 창밖을 보며 딴 생각을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답답한 교실 분위기를 못 견디고, 늘 혼자 복도에 나가 창틀에 책을 놓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틈틈이 고개를 들어 해질녘 창밖에 보이는 사람들의 스토리를 상상해보곤 했다. 어느 아저씨는 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어느 옥상에서는 빨래를 널고, 한가로운 가운데 빨래와 나뭇가지가 바람에 휘날리고 해가 저물고...보통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그때도 나에겐 흥미롭고 예뻐보였던 것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다. 명예, 돈, 자아실현 등등 다양한 가치 중에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사람'이다.
사진이 좋아서?
[사람]이 좋아서!
사진으로 직업을 바꾸고자 결심했을 때도, 남들처럼 '사진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사람이 좋아서' 사람들의 모습을 예쁘게 담고 싶어서 나에게 가장 적합한 매체로 사진을 선택한 것이다.
하고싶은 직업의 명칭을 '라이프그래퍼'로 정한 뒤, 자연스럽게 활동명이 정해졌다.
바로 '단비'다.
단비는 내 인생 최초의 별명이다.
외가에서 첫 조카로 태어났던 나는 이모, 삼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단비는 나를 너무나 예뻐해주었던 이모가 붙여준 별명이었다. 가뭄에 마른 땅을 적셔주는 좋은 비, 단비.
내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것, 그 이상으로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애정과 소중함은 훨씬 크다. 사랑하는 가족이 붙여준 첫 별명. 자연스럽게 그 이름으로 새 직업 생활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미디어, 그 미디어가 좋아서 미디어 전공 생활을 너무나 재밌게 했었다.
처음엔 다큐멘터리 PD가 되고싶었다.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가 그 이유였다. 대학 입학 첫해에는 UCC 열풍에 UCC 공모전에 종종 참여했고, 마케팅 공모전 동아리를 하면서 TVCF, 옥외광고 등의 커뮤니케이션 아이디어를 재밌게 내기도 했고, 유명한 미디어 회사의 아이패드용 어플 인턴편집기자를 하기도 했고, 작은 온라인 매거진 회사 인턴, 친구가 대표인 스타트업의 채널 및 SNS콘텐츠 담당자로 일하기도 했다. '크리에이터'를 주제로 대학 졸업 논문을 썼고, 그 이후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이 소속된 MCN 업계에서 2년 반 가량 일했다.
이렇듯 내가 했던 일들 모두 모습과 분야가 다 다르지만 '미디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진'은 작년 7월 전까지 한번도 직업으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 없는 분야였다.
대학 전공 수업 중에 사진 수업이 하나 있었는데, 그 수업을 계기로 DSLR을 구입해서 항상 들고다니긴 했었다. 그런데 그땐 사진을 잘 찍고 싶다는 욕심도 없었고, 사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좋아하는 장소에 갈 때 피사체에 대한 애정 하나로 셔터를 마구잡이로 눌렀던 것이다. 사진 자체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가벼운 취미였다. 회사 다니는 동안에는 직접 사진을 찍으러다닐 수 없으니까 예전에 찍었던 여행사진들을 한장씩 보정해서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리는 취미가 있었다. 첫 직장을 그만 둔 뒤에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서 예쁜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첫 직장과 같은 업종의 다른 회사로 이직한 뒤 다시 바빠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주지 못하는 것'이 나에게 스트레스로 느껴졌다.
내가 이런 스트레스를 느끼는 걸 깨달았던 시기에, 마침 진로에 대한 고민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러다 두 생각이 부딪치던 순간 '이걸 직업으로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까지 흐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사진을 직업으로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전환하자, 그동안 내 삶에서 해왔던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모여들었다. 사진으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왜 사진인지, 어떻게 돈을 벌 것인지 생각했을 때 위에서 언급했던 일상화보(Lifegraphy) 브랜드를 만드는 것으로 귀결됐다. 내가 그동안 해왔던 모든 경험들(서로 관련이 없어 보였던)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활용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진은 내 언어
오랫동안 나를 봐온 친구들은, 내가 사진으로 직업을 바꾼다고 했을 때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직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왜 영상이 아니라 사진이냐며 의아해했다.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얘기했다.
"사진이 시라면 영상은 소설이나 산문 같다. 사진은 추억을 1초만에 상기시키는 힘이 있다. 일상의 기억을 담거나 꺼내 보기에 가장 효율적인 매체다. 그래서 사진과 영상을 같이 하더라도 사진을 메인으로, 영상은 서브로 다루고 싶다"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면, 나는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포토샵을 독학해서 썼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학급 홈페이지를 디자인해서 직접 만들기도 했다. 대학 시절 각종 기획서를 PPT로 만들 때도 도식화하는 게 참 재밌었고, 회의할 땐 늘 생각과 개념, 구조 등을 칠판이나 빈 종이에 그림으로 그려가면서 설명했다. 첫 직장에서 정말 적성에 맞지 않던 데이터 애널리스트 일을 할 때도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작업만큼은 즐거웠다.
사진은 내 생각과 가치관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도구다.
우리가 말과 글로 소통하듯이, 나에게 사진도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다.
내가 영어로 대화할 때 떠듬떠듬 말하는 것처럼 아직은 사진으로 말하는 게 서툴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언어를 능숙하게 쓴다고 해서 서로 원활히 소통할 수 있는 게 아니듯이,
방법이 서툴더라도 진심이 있다면 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사진가(Photographer)는 내 정체성이 아니다.
'사진가'라는 말은 '글쟁이'라는 말처럼 너무 포괄적인 말이다.
글로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하다. 광고 카피를 쓰는 사람, 기사를 쓰는 사람, 시를 쓰는 사람, 영화 평론을 쓰는 사람, 소설을 쓰는 사람, 에세이를 쓰는 사람 등등... 이들에게 글은 그들의 작업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하고 매력적인 도구일 뿐이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패션 사진을 찍는 사람, 예술 사진을 찍는 사람,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사람, 광고 사진을 찍는 사람, 증명사진을 찍는 사람 등등 사진을 매체로 활동하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있다... 사진가라는 단어는 각각의 종류의 사람을 정의하기엔 부족한 말이다. 오히려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사람의 정체성은 르포 기사를 쓰는 기자나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과 더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라이프그래퍼(Lifegrapher)라는 내 직업 명칭이 좋다.
사진, 영상, 글, 소리 등 여러 매체로 사람들의 일상을 담는 사람.
핸드폰으로 매일 수많은 사진을 찍지만, 정작 10년 후에 그리워질 모습은 수천장의 셀카나 음식 사진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해서 기록할 생각도 못했던' 일상의 장면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사는 모습은 계속 변한다. 상황과 환경, 생각과 가치관, 생활패턴, 라이프스타일, 취향 등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조금씩 바뀌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보내는 일상 중에도 너무 당연해서 찍어야겠다는 생각도 못하는 순간들이 많다. 그렇게 물 흐르듯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그때 그 일상이 당연하지 않은 때가 온다. 나는 늘 같은 속도와 같은 온도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내 삶이 흐르던 그곳의 모습이 온데 간데 없고 어느새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는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그 시절 그 장면 속에 어우러진 내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도 볼 방법이 없다. 이런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일상화보(Lifegraphy)를 남겨주고 싶다.
앞으로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 받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공간에서 일상 장면들을 예쁘게 연출하여 일상화보(Lifegraphy)로 담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생각과 감정을 브런치에 글로 풀어보려고 한다.
너무나 평범해서 기록할 생각조차 못했던 일상의 가치를 되새기고자 한다.
이 글이 '라이프그래퍼 단비의 인생사진' 그 첫번째 글이다.
내 새로운 직업을 위해 찍은 프로필사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