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 의미의 분화: ‘끊다’와 ‘파다’

by 김선철



“너 어느 학원 끊었니? 난 그냥 집 근처로 정했어.”

“그 학원 끊자. 상담 전화도 잘 안 되고, 영 별로다.”


위 두 문장의 ‘끊다’는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로 쓰였다. 앞의 것은 ‘등록하다.’라는 의미이고, 뒤의 것은 ‘더 이상 다니지 않다.’라는 의미이다. 국어사전은 ‘실을 끊다.’처럼 ‘잘라서 떨어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끊다’의 의미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끊다’의 뜻갈래≫(표준국어대사전)


1. 실, 줄, 끈 따위의 이어진 것을 잘라 따로 떨어지게 하다.

2. 관계를 이어지지 않게 하다.

3. 하던 일을 하지 않거나 멈추게 하다.

4. 습관처럼 하던 것을 더 이상 하지 않다.

5. 공급하던 것을 중단하다.

6. 배달하던 것을 배달하지 못하게 하다.

7. 길 따위의 통로를 막다.

8. 말을 잠시 중단하다.

9. 말이나 문장 따위에서 사이를 두다.

10. 옷감이나 표 따위를 사다.

11. 수표나 어음 따위를 발행하다.

12. 목숨을 이어지지 않게 하다.

13. 전화 통화의 송수신을 멈추게 하다.

14. 거래나 셈 따위를 매듭짓다.

15. 목표 지점을 통과하다.


그렇다면 ‘등록하다’라는 의미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다음과 같은 표현들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입장권을 끊다. / 헬스장 1년권(또는 피티)을 끊다. / 회원권을 끊다. ...


즉, 10번 의미에서 영역이 번져서 학원, 헬스장, 스키장과 같은 일정한 요금을 내는 장소에 등록하다라는 의미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번에는 ‘잘라내다’라는 의미가 어떻게 10번의 ‘옷감이나 표 따위를 사다.’라는 의미에 이르게 되었을까. 흔한 추측은 옷감을 살 때는 한 필을 통으로 사는 것보다는 필요한 만큼 잘라 사는 일반적인 구매 형태에서 왔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럼 표는? 이것도 마찬가지로 두루마리 형태의 긴 종이를 잘라가면서 표로 팔던 시대의 소산이라는 설이 있다. 다른 의견으로는 표를 반으로 나누어 보관용은 두고 나머지는 구매자에게 주던 형식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안타깝게도(?) 두루마리에서 끊어 주던 표는 필자의 기억에 없고, 매표원이나 검표원이 종이표를 찢어 나누던 기억은 어렴풋하나마 난다.


‘등록하다’와 유사한 의미로 쓰이는 말로 ‘파다’가 있다. 요즘 이 ‘파다’는 날로 세력 범위를 넓히고 있다. 우선 사전에서 어떻게 분석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파다’의 뜻갈래≫(표준국어대사전)


I. 「…을,…에 …을」

1. 구멍이나 구덩이를 만들다.

2.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다.


II. 「…을」

1. 천이나 종이 따위의 한 부분을 도려내다.

2. 어떤 것을 알아내거나 밝히기 위하여 몹시 노력하다.

3. 드러나 있지 아니한 것을 긁어 떼어 내다.

4. 전력을 기울이다.

5. 아기가 젖을 몹시 빨다.

6. 문서나 서류 따위에서 어떤 부분을 삭제하다.


근래에 급격하게 형성되고 있는 용법이면서 비유적 쓰임으로 보여 아직 사전에 정식으로 올라간 풀이는 아니나, 아래와 같은 표현이 꽤 쓰이는 중이다.


계정을 파다. / 아이디를 파다. / 이메일을 파다. / 전화 회선을 파다.


이 ‘파다’가 ‘생성하다’라는 의미임은 누구나 알 만한데, 어찌하여 ‘구멍을 만들다’ 또는 ‘새기다’라는 기본 의미가 ‘생성하다’에 이르게 되었는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추측은 ‘도장을 파다’에서 파생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도장을 판다는 것은 곧 만든다는 의미이다. 또 지금은 인감 제도가 약화되고 있지만 과거에 서명이 법적 지위를 얻지 못하였을 때 도장은 개인이나 법인 등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거의 모든 서류나 서식에 도장 찍는 곳이 있어서 은행이나 관공서에 드나들려면 반드시 도장을 가지고 가야 했다. 오히려 신분증보다는 도장이 더 중요한 때도 있었다. 따라서 도장을 새로 만드는(파는) 일은 인격체를 하나 만드는 일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파다’가 ‘생성하다’라는 의미를 낳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그러나 ‘도장을 파다’에서 ‘(계정 등을) 생성하다’라는 의미가 곧바로 연상되기에는 조금 먼 감이 없지 않다. 그 중간에 존재하여 양 끝을 이어주는 것으로 여겨지는 표현이 ‘명함을 파다’와 ‘통장을 파다’, ‘신용카드를 파다’ 등이 아닐까 한다. 급기야 ‘단톡방을 파다’라는 표현도 쓰이고 있다. 전체를 이어 보이면 다음과 같아진다.


도장을 파다 - 명함을 파다 - 통장(신용카드)을 파다 - 계정(계좌, 금융사(은행, 증권사), 아이디, 이메일, 전화 회선)을 파다 - 단톡방을 파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로 놀라운 연상 작용이 아닌가. 언중의 창의성에 심심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이러한 의미 분화 과정을 언어학에서는 ‘연상 작용’에 의한다고 본다. 연상은 어디로 튈지 모르니 언중의 창의성에 따라 언어는 이론상 무한 분화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하다’, ‘되다’, ‘가다’와 같은 기본 동사이다. 이것들의 의미가 얼마나 많은지 보시기 바란다(세 가지 동사의 보조동사 용법은 생략하고 ‘하다’의 의미 가운데 본동사의 용법만 소개한다). 이 의미들은 앞으로도 더 늘어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것이 사전 편찬자나 언어 연구자들이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하다’의 뜻갈래≫(표준국어대사전)


I. 「…을」

1. 사람이나 동물, 물체 따위가 행동이나 작용을 이루다.

2. 먹을 것, 입을 것, 땔감 따위를 만들거나 장만하다.

3. 표정이나 태도 따위를 짓거나 나타내다.

4. 음식물 따위를 먹거나 마시거나 담배 따위를 피우다.

5. 장신구나 옷 따위를 갖추거나 차려입다.

6. 어떤 직업이나 분야에 종사하거나 사업체 따위를 경영하다.

7. 어떤 지위나 역할을 맡거나 책임지다.

8. 어떠한 결과를 이루어 내다.

9. 무엇을 사거나 얻거나 하여 가지다.

10. 값이 어느 정도에 이르다.

11. ((값어치를 나타내는 말과 함께 쓰여)) 기대에 걸맞은 일을 행동으로 나타내다.

12. ((주로 ‘할 것 없다’ 구성으로 쓰여)) 분별하여 말하다.


※ 모두 34가지 의미 가운데 나머지 22가지는 생략하니 직접 사전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표를 끊다’나 ‘계정을 파다’가 어떻게 만들어진 표현인지, 여러 가지 추측 가운데 어느 하나만 맞는지 또는 모두 다 맞는지 알아내기는 어렵다. 실은 대부분의 경우 낱말 의미의 분화 과정과 이유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직접 관찰하거나 증거를 포착하기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수많은 언중 어느 누군가가(1명 또는 여러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내고 이것이 점점 퍼져서 일반화되지 않았겠는가. 누가 언제 어디서 그것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을 얻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점은 삼척동자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근래에는 정보통신 기술에 힘입어 낱말 차원에서 간혹 창안자가 특정되는 일이 있다. 이제는 잘 쓰이지 않는 ‘안습’이나 ‘아햏햏’과 같은 예가 그렇다.


이렇게 대부분의 언어 표현은 불특정 다수인 언중에 의해 만들어지고 쓰이다가 생명을 다한다. 그 이유와 과정은 언어학의 주요한 연구 대상이며, 전 세계의 많은 언어학자들이 불철주야 그 원리를 밝히기 위해 애쓰고 있다. <끝>


**이 글은 <<말과글>> 2024년 겨울호에 실린 것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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