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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Oct 16. 2019

높고 좁은 담장 위의 진실과 진리

잘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도 애도할 수 있다면

어제 오전, 설리에 관한 기사 하나를 보았다. 난생처음으로 네이버에 게시중단요청이라는 걸 했다. 초저녁에 고객센터에서는 이런 답변을 메일로 보내왔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네이버 고객센터입니다.


일부 부적절한 기사로 인해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우선, 해당 언론사로 내용을 전달한 상태인데요, 저작권자인 언론사로 직접 문의해 주신다면 신속하고 자세한 답변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네이버에서 제공되는 모든 기사의 경우에는 저작권이 언론사에 있어 네이버에서 수정/삭제의 조치가 어려운 점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네이버 뉴스 담당자 드림'



네이버에서는 직접 조치를 할 수 없다고 했지만, 기사를 내보낸 매체에서도 네이버 채널에서도 기사는 이미 삭제되어 있었다.





나라고 설리라는 사람에 대한 생각들이 남들보다 얼마나 다를 수 있었을까. 특별히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남들만큼 잘 알지도 못했다. 다만 모두가 감지했을 불안한 모습들이 몇 년 동안 눈에서 스친 것이 있을 뿐이다.

그래. 고작 그게 있어서, 얼마 전 영화 <메기> GV 행사의 뉴스를 읽었을 땐 나도 모르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 사람은 내면에 언어가 있었구나. 그래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하고 짐작했다.


점점 더 많은 말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엊그제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옆자리 동료가 '샘, 설리, 죽었대요'라고 속삭였을 때, 서늘했던 느낌은 며칠 전의 얇았던 그 안심과 기대가 휙 걷히며 온 것이었을 것이다. 놀랍고 안타까웠다. 내가 잘 몰랐던 그 사람을 끝내 잘 알지 못한 채로 이 세상의 한 시간이 끝났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일이 다시 한 번 떠오르고, 그 느낌이 슬픔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14일 밤 잠들기 전 10년 전의 가을날이 생각나서였다.

2008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한 사립미술관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다. 한 계절이 지나도 친해질 수 없었던 직장 사람들과 점심 회식으로 칼국수를 먹다가, '어머, 최진실이 죽었대'를 들었었다.


최진실, 아, 설리 본명이 최진리라고 했었는데. 진실과 진리. 진실과 진리, 하고 입술 안에서 맴도는 두 이름의 뜻을 생각했다. 그리고 인생에서 잘 알았던 적이 없는 두 사람의 닮은 죽음에 진심으로 슬픔을 느꼈다.  




 

그때의 최진실의 얼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무르팍도사>에 나와서 배추전을 부쳐 먹고, 말하고 웃던 얼굴. 한 번 더 그런 힘든 일이 생기면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 말을 하면서 최진실은 가만히 웃었다. 태연해진 것처럼.

그러나 화면 밖에서 보기에도 괜찮지 않은 웃음이었고, 담장 끝까지 올라갔지만 아직 넘어내려오지 못한, 안전하게 착지하지 못한 사람의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손끝과 발끝에 힘이 들어가 있다. 긴장하고 애쓰고 있는 얼굴.


최진실이 죽은 그날 칼국수가 늘어놓인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앉아서 나는 화를 참았다. 오가는 이야기들이 멀게 들리고, 담장 끝에 올라 웅크리고 있던 사람을 땅바닥에 동댕이치는 세상이 무섭고 밉다고 생각했었다.

최진실은 알기는 하는, 하지만 알기만 하지 잘 안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슬픔과 불안이 너무 뚜렷했다.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하는 나조차도 그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날 그 사람들이 최진실의 자살을 가볍게 이야기하고 칼국수를 맛있게 먹어서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여기가 아니었다면 그 사람은 죽지 않았을 것 같아서 화가 났다. 그것말고는 그 사람이 죽을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감지했을 불안한 모습들, 그 불안함.

이 담장 안에는 사람을 불안한 작은 짐승으로 만드는 세계가 있다. 그런 짐승이 발견될 때, 품고 거두는 구석이 있길 바라는 희망이 있고, 그 짐승을 사냥하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힘을 휘두르는 현실이 있다.


얼마 후 나는 대학로에 있는 ㅇ미술관에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273번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면서 이소라의 앨범을 자주 들었다. 그러다 ‘Track4’가 나오면 최진실이 떠올랐다. 노래 중간에 멜로디가 끊어져 소리가 비는 순간마다 나는 어김없이 차창 밖의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버스 안에 쏟아지던 햇살, 마로니에 공원의 노란 은행잎, 뚝뚝 끊어지는 기타 연주, 붕어빵 굽는 냄새. 최진실의 죽음을 떠올리면 그 노래와  풍경들이 떠오르고, 그 노래와 그 비슷한 모든 풍경이 지금도 최진실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 업무 자료로 자주 찾아봤던 버스터 키튼의 무성영화 화면 앞에서 나는 고개를 젓곤 했다.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사무실의 칸막이 안에서 저마다, 설리는 원래 불안불안했다는 말을 했다. 설리가 누구냐는 팀장의 물음에 상사 하나가 대답했다. 맨날 SNS에서 이상한 짓 하던 애 있어요. 그런 말들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드러내 말하지 못했다. 나는 설리를 좋아한 적도 없고 지지한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했으니까.


설리가 죽은 다음날, <더 팩트>라는 매체에서 경찰이 설리의 시신을 수습해 차에 싣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보도했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국립진주박물관 특별전 기사를 읽고 있었는데, 창 모서리에 연관 뉴스로 그 기사가 표시되었다.

도대체 왜 이런 것까지 내보내는 거야, 하고 기사를 클릭했다가 사진을 보고 얼어붙었다. 들것에 실린 바디백 위치에 거칠게 모자이크를 넣은 사진이었다. 바디백 위에 모자이크를 넣어 마치 그 자리에 흐트러진 죽음의 모습이 있을 것처럼 들여다보게 만드는 사진이었다.


나빴다. 이건 정말로 나빴다.


아,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도대체 왜? 네이버 고객센터와 <더 팩트> 홈페이지에 들어가 유해게시물 신고를 했다. 그런데 내용을 작성하는 난 안에 써넣을 말이 별로 없었다.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이렇게나 화가 나는데 그걸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자살 보도에 관한 윤리강령에 맞지 않을 뿐더러, 고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기사이니 네이버 뉴스 채널에서 게시를 중단하고 기사를 삭제해 달라.

멈칫멈칫 늘려나간 말은 그게 다였다.


 



조롱과 비난이 사람을 정신적으로 죽인다는 건 눈으로 귀로 피부로 쏟아질 때의 일이고. 바이트로 환산되는 낄낄거림과 저주는 테두리를 특정할 수 없기에 오히려 그 이상의 힘이 있다는 걸 모두가 안다.

10년 전에도 악의적인 보도와 악의적인 반응은 이미 넘치게 많이 있었다. 그 당시 온라인에서 최진실에게 쏟아지던 비난을 종이에 옮긴다면, 그건 충분히 한 사람을 물리적으로 죽일 수 있는 정도의 양이 아니었을까. 호흡하는 사람을 파묻어 질식시킬 수 있는, 물리적으로 매장할 수 있는. 지금은?


신고를 작성하면서 고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라고 썼지만 나는 마치 내 자신이 훼손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인간이 무더기로 훼손되어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사진을 보고 신기해 하건, 즐거워 하건, 화를 내건, 슬퍼하건 무관심하건 우리 모두는 이미 훼손되었다. 이런 뉴스들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훼손되고 망가지고 못쓰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속이 뜨겁고 답답했다.

물어뜯은 사람들과 물어뜯긴 사람들이 물어뜯을 다른 사람을 찾아 물어뜯고, 또 뜯고, 그 와중에 계속해서 담장 위에서 균형을 잃는 사람들은 생겨날 것이다. 최진실과 최진리의 사이에, 최진실 전에, 최진리 후에.


나는 또다시 같은 생각을 했다. 여기 살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텐데. 아직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고, 결혼을 하고, 그런데 폭력을 당하고, 맞아서 멍든 얼굴을 내보인다고, 브래지어로 몸을 가리지 않는다고, 이런 사진을 찍더니 저런 사진을 찍는다고.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닌 곳들이 많고, 그래서 다시 잘 살아갈 수 있는 곳들, 그런 곳에서라면 두 사람은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기회가, 선택지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나는 여기에 살면서도, 그들이 여기에 계속 살려고 했다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지난 밤 나는 일을 하고 점심시간엔 운동을 하고, 퇴근 후엔 강연을 듣고 왔다. 그리고 <뉴스룸> 앵커가 김명신과 설리의 죽음을 엮은 브리핑을 한 걸 기사로 읽었다. ‘사나움’, 앵커가 인용한 김명신의 문장에 나는 한 번 더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어 캔맥주를 하나 땄다.

지친 몸에 맥주가 들자 취기가 금세 올라서 반 남짓은 버렸는데도,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눕는 순간에는 천장이 한 바퀴를 리드미컬하게 휭휭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최진실과 최진리, 탄실과 설리, 이렇게 간단히 엮을 수 있도록, 서로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죽어가는 것이 슬프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자, 피로감이 꺼풀 밖으로 흘러넘칠 듯 했다. 그대로 지금의 풍경들을 생각했다. 점심 시간에 창가 자리에서 사이드플랭크를 했다. 몸의 앞면은 햇빛이 닿아 뜨겁고, 뒷면엔 선풍기 바람이 닿아 추웠다. 식당에서 얼린 고기를 가는 소리를 들으며 햄버거를 먹었다. 남자친구와 정류장에 서 있을 때 양말만 신은 다리에 차게 감기던 공기, 차트에 다시 나타난 설리의 노래. 이 모든 가을들의 기억 속에 잘 몰랐던 사람들의 알 수도 있었던 죽음이 깃드는 세계. 서로를 훼손해가는 세계에 지금 나는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잠들기 직전 아직 내가 기억하는 두 사람의 웃음과 말들을 떠올렸다. 어릴 적 좋아했던 쉼보르스카의 시를 생각했다. '당신들은 틀림없이 그 방이 비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자살한 사람들의 방」).'

그렇다. 비어 있지 않은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이런 생각들도 애도가 될 수 있는 걸까. 사나움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아직 높고 좁은 담장에 기어오르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여전히 화사한 웃음과 차분한 말을 가진 살아있는 사람들.

기회보다, 선택지보다, 기어오르고 있는 그 사람들이 감은 눈 위로 떠오르는 밤이었다.



유주얼



황해도 봉산 휴류산성 성벽, 유리건판(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촬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건판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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