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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Dec 04. 2019

스스로를 보살피기에 서툰 시절은 누구나 있다

혼자 사는 모두가 처음부터 잘 살지는 못한다



얘들아, 밥은 먹고 다니니?

내 주말은 남들보다 반나절 늦게, 토요일 오후에 시작한다. 토요일은 오전에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열일곱부터 스무 살, 혹은 스물한 살. 학원 주변에서 자취하는 재수생이 가장 많다. 입시 때문에 지방에서 올라와 지내는 것이다. 매주 토요일 아침, 대치동 한복판 학원에 졸린 눈을 하고 나와 앉아 있는 그 스무 살 애들에게 나는 매번 같은 질문을 한다. “너 아침 먹었어? 뭐 먹고 왔어?”

그 질문을 할 때마다 어째 내가 한참 더 나이 먹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학생들이 뽀얗게 웃으면서 콜라요, 곰 젤리요 하는 걸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정말로 속상한 마음이 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와서 수업을 듣는데 고작 저런 걸로 때워서 어떻게 하나 싶어서다. 그런가 하면 매번 아침을 거르고 오던 아이가 “샘, 저 오늘은 일어나서 샌드위치 먹었어요”하는 날은 뭐가 이렇게 뿌듯하고 기쁜지, 내가 사준 것도 아닌데.

내게도 그런 질문을 던져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무 살에 서울에 막 올라왔을 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살기 시작했었다. 그때 너 밥 먹었냐고, 요새 뭐 먹고 다니느냐고 물어봐 주던 그들의 작은 염려를 이제 나도 깨달아간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것에 아직 서툰 시절이, 홀로 사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반찬이 뭐라고, 쭈글쭈글했던 스무 살

스무 살에 서울에 올라와 처음 얻은 방은 고시원이었다. 낙관했던 기숙사 추첨에서 떨어지고 부랴부랴 방을 알아봤다. 학교 앞에 남은 방이라곤 반지하와 고시원. 그 중에 나는 후자를 골랐다. 개중에 넓은 방이었고 창문을 열면 서교동성당이 내려다보였다. 지내기에 나쁘지 않았다. 다만 거기서는 뭘 먹는 게 어려웠다. 이유는 우습게도, 반찬이 없어서였다.

고시원 방에도 미니 냉장고가 있었지만, 주방 겸 식당에도 큰 냉장고가 있었다. 그 안에는 늘 이름표가 붙은 반찬통이 꽉꽉 차 있었다. 밥때마다 사람들이 식당에 내려와서, 제각기 자기 반찬을 꺼내 밥을 먹었다. 그리고 주말 저녁이 되면, 집에 다녀온 사람들이 쇼핑백에서 반찬통을 꺼내 냉장고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그걸 볼 때마다 괜히 먹먹하고 서러운 기분이 들곤 했다.

반찬쯤은 내가 해먹을 수 있다고 자신했었지만, 거기엔 음식을 만들어 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반찬통 뚜껑 여닫는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식당에선 계란후라이 한 장 부칠 때도 괜히 눈치가 보였다. 반찬 같은 건 그냥 사 먹으면 된다는 단순한 사실조차 몰랐던 어리숙한 과거의 나는, 그냥 그런 불편한 순간들에서 멀어지는 것을 택했다.


사소하게 어려운 게 더 어렵던 시절

정말로 건져 먹을 장조림 한 통 없는 걸 비관한 것은 아니다. 그래, 그래도 스무 살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때 서글펐던 건 기대한 것처럼 멋지게 굴러가지 않는 생활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 자꾸만 무력하고 소심한 내 모습이 돋보이는 것이 자존심 상해서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사소한 고민들조차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고작 반찬 얘기 같은 걸로 바쁜 부모님께 응석을 부리거나 걱정을 끼치기 싫었다. 뭐든 알아서 하는 게 어른이라면, 나도 이제 어른이니 언젠간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기대와는 달리 스물이 되고 대학에 가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꿈꿨던 ‘서울에서 혼자 사는 멋진 어른의 삶’은 아직 내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갔는데, 변신의 순간은 오지 않는다. 요정도 나타나지 않고 도깨비도 나타나지 않는 길 위를 그저 하염없이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인 것은 정말로 어느 정도는 알아서 살 줄 알게 되었을 때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으로부터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서울에서 휘청이던 나를 붙잡아준 서울의 사람들


그런 나도 딱 한 번, 그 고시원 냉장고에 반찬통을 차곡차곡 넣어본 적이 있었다. 어느날 아침 갑자기 동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자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반찬을 몇 가지 싸주셨다는 것이다. ‘콩자반하고 오징어채는 쫌 오래 먹어도 된대. 근데 이 나물이랑 메추리알은 이번 주에 다 먹어야 하고. 그리고 이거는 불고긴데, 오면서 상할까 봐 엄마가 미리 볶아서 줬어. 그래도 오늘 바로 먹으래.’

내가 사는 고시원 앞까지 찾아온 친구는 쇼핑백에서 반찬통을 하나하나 꺼내 보여주며 설명까지 해주었다. 그리고는 바로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며 학교 쪽으로 사라졌다. 아직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학기 초였다. 환영회 때나 몇 마디 이야길 나눠보았을 뿐인 동기와 그 가족의 호의는 무척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얼떨떨했다. 그날 저녁 나는 고시원 식당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맛있게 밥을 먹었다.

내가 살던 고시원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서교동성당 앞의 그 빌딩을 지나면 입구 층계참에 새초롬하게 앉아 있던 친구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친구의 어머니도 같이 생각한다.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딸의 친구에게 정성스럽게 반찬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신 분이 계셨다고. 그 귀한 찬들을 싹싹 비우고서야 휘청이던 발을 서울에 딱 붙이고 비로소 일어난 스무 살짜리, 그게 바로 나였다.


지금 휘청이는 다른 시작들을 살펴보기


그런가 하면 ‘이 동네에 어디 뭐가 있는지는 아니?’하며 장 볼 만한 마트를 알려 준 선배 언니도 있었다. 드디어 그 고시원을 나올 적에는, 근처에 살던 선배들이 학교에서 손수레를 빌려다 이사를 도와주기도 했다. 짤막짤막한 순간들이었지만 그들의 보살핌은 분명 내게 큰 격려와 지지가 되었다. 그렇게, 너울가지도 없는 후배였던 나의 어설픈 시작을 지켜보고 격려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한겨울 앞뒤로 춥고 흐린 날, 혼자 걷는 길에서 나는 항상 스무 살 때 봄을 떠올린다. 이제는 안다. 삶의 장면들은 결코 페이지 넘기듯 매끄럽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끝난 줄 알았던 기다란 문장이 다음 장에도 몇 줄씩 꾸역꾸역 이어져서 당황하는 것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진짜 시작이라는 것도.

매주 어린 홀로살이들에게 묻는다. 아직 굳건해지지 않은 어떤 삶들, 매일의 다짐과는 달리 때론 휘청이기도 할 스무 살들에게 묻는다. 밥은 먹고 다니니? 몇 달 스치다 말 사이여도, 나는 지금 그들의 안부를 알고 싶다. 서툰 솜씨로 스스로를 보살피기 시작한 그들의 시작이 조금 더 건강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오래 전 나를 살피고 걱정해주었던 그 사람들처럼.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수업을 마치는 인사는 언제나 똑같다. ‘점심 맛있게 먹으렴.’ 학원을 나와 정오를 지난 한낮의 거리로 걸어 나가면 비로소 나의 주말이 시작된다. 흐리고 쌀쌀한 토요일, 나는 내게도 묻는다. 점심 뭐 먹을까? 추운데 든든한 걸로 먹자, 하고.



유주얼




백자청채육각찬합, 일본, 높이 3.1cm, 입지름 6.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고적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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