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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Dec 16. 2019

지금 쓸래, 좋은 거.

싱글도 좋은 물건 사쓰면 안 되나요?



취향은 있는데 돈이 없던 자취꾼들


지난봄에 오래 써 온 찻주전자를 버렸다. 그 뒤로 계절이 두 번 바뀌도록, 나는 아직 새것을 들이지 못하고 있다. 알록달록 버찌 무늬가 귀엽던 찻주전자는 대학생 때 친한 후배가 선물해준 다이소표 물건이었다. 오랫동안 그걸로 차도 우리고 커피도 내리며 애용을 했다. 여기저기 실금이 가고 찻물이 배어 얼룩도 올랐지만, 그것도 그 나름 멋이겠거니 닦아가며 써왔다. 그랬던 터라, 주둥이가 깨진 주전자를 헝겊으로 감싸 버리면서 무척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한동안 오랜만에 살림에 새 물건을 들일 틈이 생겼지만, 빈자리에 남은 정이 생각보다 깊었다.

  스무 살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방을 얻고, 살림살이라고 할 만한 게 구색을 갖추기까지 못해도 2~3년은 걸린 것 같다. 처음에는 당장 필요한 걸 꾸리는 데도 몇 달이 걸렸다. 손톱을 깎으려면 손톱깎이를 사야 한다. 카레를 한 번 만들어 먹으려면 감자칼도 사야 한다. 물론 가구부터 커튼 한 장, 구둣주걱까지 부모님이 싹 사다 넣어주셨다는 친구들도 더러는 있었다. 찻주전자를 사준 후배도 그런 드문 경우였다. 그러나 ‘당연히 집에 있는 것’으로만 알았던 자잘한 물건들은 결국 살아보며 스스로 채워야 했다. 

  이렇게 온통 사야 할 것투성이라, 그때마다 하나하나 튼튼하고 좋은 걸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이상은 위즈위드나 1300K였지만 현실은 다이소와 마트. 다이소가 보이면 일단 들어가 기웃거리게 된 건 그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뭐가 필요했더라, 우와 이거 그 언니 주면 좋아하겠다, 하면서. 그래도 열심히 사고 채우기를 반복하다보면, 드디어 저녁 한 끼 해먹는데 ‘아, 맞다! 그거 없는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점이 온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뒤로 오래오래 썼답니…그렇게 오래?


자, 살림이 어느 정도 차고 나면, 이제는 살림이란 게 한 번 들이고 나면 얼마나 오래 쓰는 것인지를 알아갈 차례이다. 의식적으로 멀쩡한 걸 버리지 않는 한, 밥공기 하나, 젓가락 한 벌을 새로 살 기회는 아주 천천히 온다. 이번에 버린 그 찻주전자도 12년이나 쓴 것이었다. 어릴 적 할머니가 머리를 쪽찔 때 쓰시던 30년 된 경대나 참빗 같은 것들도 이렇게 부지중에 햇수를 더해갔으리란 생각이 든다. 이건 10년 써야지, 20년 써야지 정해놓은 게 아니라 쓰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하며 별 생각 없이 장바구니에 던져 넣었던 저렴한 물건들과 나는 여전히 같이 살고 있다. 만약 이렇게 오래 쓸 줄 알았다면 나는 살림을 다르게 꾸렸을지 모른다. 내 취향에도 맞고 더 질이 좋은 물건을 찾을 때까지, 조금 더 천천히 고르고 기다리지 않았을까. 그럼 지금부터라도 좋은 것을 사기 시작하면 되는 게 아닌가? 비혼 아니면 만혼이 흔해지는 사회, 내 삶도 예외 없이 그 사이 어디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살림살이의 중요성을 깨닫고 난 후에도, 나는 막상 좋은 살림살이를 사는 것을 여전히 망설일 때가 많았다. 결혼하기 전엔 좋은 살림을 갖추고 살 필요가 없다는 시선들 때문이다.


미혼도 좋은 거 쓰면 안 되나요?


이제 막 독립생활을 시작한 회사 동료가 수납장을 구입했다. 며칠 동안 월드컵을 방불케 하던 토너먼트식 쇼핑의 최종 승자는 ‘저렴하고 무난한’, 소위 국민수납장으로 불리는 캐비닛이었다. “저는 원목 사고 싶었는데, 엄마가 그런 건 결혼하고 사래요. 돈 아깝다고.” 얼마 전에 전기 토스터를 샀다가, ‘자꾸 잡동사니 늘리지 말라’는 잔소리를 들었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신인 사람이 고급 가구나 대형 가전을 사려는 계획을 간파하면, 어른들은 대부분 그런 건 나중에 혼수로 사라고 한다. 기성세대에게 혼수는 여전히 ‘최대한 좋은, 무조건 새 물건’이다. 우리 엄마도 내 살림살이를 전부 잡동사니라고 부른다. 엄마는 지금도 굳게 믿고 계실 것이다. 아마 언젠가 결혼을 하면 내가 지금의 살림을 허물 벗어내듯 싹 버릴 것이라고.

  물론 이 문제의 근본은 과시적인 결혼문화에 있는 게 맞다. 그러나 그 믿음은 결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결혼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두루 영향을 미친다. 당장 결혼을 준비하지 않는 독신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비혼으로 살겠다고 결정하지 않은 이상, 일단은 다 미혼이 아닌가. 


좋은 걸 쓰고 싶다, 바로 지금


지금 아꼈다 나중에 사도 되는 좋은 것들, 좋다. 하지만 그 나중이 과연 언제인 걸까. 나중에 신혼집엔 냄비 하나도 쓰던 걸 가져갈 생각 말라는 엄마 말씀을 나는 이제 웃으며 흘려듣는다. 오히려 정말 싫은 것은, 몇 년째 빨래건조기를 무척 사고 싶어 하면서도 지르지 못하는 나 자신이다.

  베란다가 없는 집이라서, 사철 미세먼지가 극성일 때마다 집 안에서 빨래 말리기는 보통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건조기 구입을 계속 미뤄왔다. 핑계는 많았다. 집이 좁으니까, 비교적 고가품이니 잘 알아봐야 하니까…. 그러나 사실은 스스로 내 어깨를 돌려세워 왔을 뿐이다. 건조기 같은 건 나중에, 하고.

  ‘언젠가는’ 구입할 테지만 ‘아직은’ 구입하지 않는 것. 대신 작은 제습기를 샀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집 안에 빨래를 넌다. 이런 결정의 유예가, 결국은 혼자 사는 지금 내 삶의 질도 함께 잡아 앉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 삶에 귀 기울이지 않던 나는 지금 좋은 걸 마련해서 쓰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마호가니 책상 위에 팔을 괴고 싶다


올해 초에 치워버렸던 책상을, 여름에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소설을 본격적으로 연습하기 시작하면서이다. 그때 어릴 때 좋아했던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대학생이 된 주디가 처음으로 가져 본 자기 방을 열심히 꾸미는 이야기였다. 커튼도 달고, 쿠션도 사고, 3달러를 주고 중고 마호가니 책상도 사온다. 마호가니 책상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모르면서, 어른이 되면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2층, 여덟 평, 방 하나에 욕실 하나. 독립한 후 나는 이런 내 삶의 테두리를 잊어본 적이 없다. 그럼 이 작은 집 안을 채우고 있는 가구와 물건들을 무엇일까. 아마 내 삶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목구비 같은 것일지 모른다. 나는 앞으로 천천히 책상을 마련할 생각이다. 내 마음에 꼭 알맞은, 나의 집에 꼭 어울리는. 언젠가는 나도 “…크고 네모난 마호가니 책상도 있어요. 이 책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소설을 쓰면서 이 여름을 지낼 거예요.”하는 손편지를 누군가에게 쓸 수 있을까. 그때쯤이면 그 편지 옆에 새로운 찻주전자도 하나 놓여 있을 것이다.


유주얼




Cup and Saucer, ca. 1780, French, possibly © 2000–2020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A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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