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 거북이 Feb 17. 2021

편지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군시절에 가장 많은 글을 썼다. 20대 초반에 학교를 휴학하고, 자의 반 타의 반 멋모르고 군에 입대하였는데, 환경, 사람, 신분, 복장과 헤어스타일, 내가 알던 상식까지도 모든 것이 바뀌었기 때문에 내가 알던 일상과 내 주위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상명하복 문화로 경직되어 터 놓고 말할 상대가 적은 군대의 특성상, 순간순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편지를 틈만 나면 썼었다.


훈련소에서 처음 집에 편지를 쓸 때, 무슨 말을 어떻게 적을까, 너무나 고민이 되었다. 행여나 내가 힘든 것, 어려운 것을 적게 되거나 은연 중에 그런 뜻이 담긴 글을 쓰게 되면,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것 같아, 하나도 힘들지 않고, 씩씩하게 훈련 잘 받고, 잘 지내고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휠씬 덜 힘들다고, 거짓말로 편지를 써 내려갔었다. 편지 봉투에 우리 집 주소를 쓰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편지는 우리 집에 마음대로 가는데, 나는 갈 수가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아주 약한 어떤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 서글펐다.


그 편지를 솔직하게 썼더라면, 아마 이런 내용을 썼을 것이다. 입소 첫날 잠자리에 들면서 불편한 군용 매트리스를 깔고, 땀냄새 나는 베개를 베고, 내무실 하얀 베니아판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내가 왜 내 발로 군대에 왔을까? 이제 하루 지났는데 너무나 모든 것이 낯설어서, 남은 날들이 그저 무섭기만 했습니다. 다시 집에 돌아갈까?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다, 만약 집에 다시 돌아가면, 부모님께 뭐라고 설명을 드려야 할지, 너무나 창피해서 낯을 뵐 수나 있을지 생각해보고는 중도포기 할 생각을 접고, 그냥 끝까지 군생활 하자고 마음을 다 잡았습니다. 이렇게 써 내려갔을 것이다.


차마 부모님께 그리고, 내가 아는 어떤 사람에게도 말하기 싶지 않은 진실이었기에 편지에 쓸 수가 없었다. 아쉽게도, 여자친구가 없었기에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동기들이 그저 부러웠다.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아팠다. 군대 제대하면 내가 여자친구부터 사귄다. 이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자대에 배치 받고도, 편지쓰기는 계속되었다. 집으로 한 통 편지를 보내면, 어머님과 여동생이 매번 각각 답장을 보냈기에 답장의 답장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였다. 이등병에게 편지 쓸 시간은 얼마 주어지지 않았지만, 짧은 시간에 최대한 빠르게 편지를 썼기에 일주일에 두 통 정도는 쓸 수 있었다. 편지를 쓸 거리는 너무나 많았다. 대학생 1년 동안 나는 정말로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는데, 갑자기 군인이 되고 나니, 대학생인 나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인 듯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방탕함, 게으름, 나약함을 정말로 반성하며, 앞으로 이렇게 살겠다, 이렇게 하겠다는 다짐만으로도, 편지지 한 두 장은 매번 꽉 채웠었다. 이등병때라 당연히 모든 일이 어렵고, 솔직히 그 당시 나는 어리버리 했었다. 군인인 나 자신에게 적응을 못하던 시기였는데, 편지를 쓰고, 답장을 읽는 시간은 군인 신분을 내려놓고, 익숙했던 내 자신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많은 위로가 되었고, 기록된 글자의 힘이 어떻다는 것을 매일 체감하며 살았다.


 어머님과 여동생은 일상의 많은 이야기들을 편지에 담아서 보내줬는데, 평범한 그리고, 지극히 일상적인 이 편지가 가끔씩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렇게 오래 같이 살았지만, 한번도 나에게 얘기하지 않았던, 솔직한 생각이나 감정을 적어 보내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어머니는 무뚝뚝하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생각과 행동이 싫지만, 고쳐지지 않을 것 같아 이제는 포기하고, 참으시는 것이고, 나 또한 이해를 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솔직히 편지에 쓰셨다.


아버지를 닮아 나 또한 내가 옳다고 생각되면, 물러서지 않아 아버지와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머니는 당신이 사랑하는 두 사람이 그렇게 싸우는 것을 마음 아파하셨고, 항상 중재하려고 나 몰래 많은 노력을 하셨었다. 내가 새벽까지 술 마시고, 늦게 귀가하면서 ‘다 자고 있으니까 아무도 모르겠지.’하고 도둑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걸어 들어오는 발소리도 매번 다 들으시고, 아버지께서 화를 내면서 안방 밖으로 나가시려고 할 때마다 팔을 붙잡고 만류하셨었다. 이제 대학교 1학년이다. 저 나이에 친구들과 좀 어울릴 수도 있고, 절대 나쁜 짓을 할 애는 아니지 않냐,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정신 차릴 것이다. 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이고, 아버지께서도 매번 그 말에 수긍하시고, 화를 참고, 다시 잠자리에 드셨다.


내가 신나게 늦게까지 술 마실 동안, 어머니는 언제 들어오나 하면서 항상 잠도 안 주무시고 계셨던 것이다. 물론 아버지께서도 안 주무신 것이다. 이 이야기가 왜 놀라웠냐 하면, 나는 부모님을 실망시킬 만큼 나쁜 짓을 하지 않는데도, 부모님께서 쓸데없이 나를 믿지 못하고, 간섭하고, 참견하신다고 생각하였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가장 마음에 상처를 받았던 일은, 학교 마치고, 친구들과 늦게까지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뭐 하고 이제야 들어왔냐고 하시며, 부모님께서 내 가방을 뒤져서 소지품 검사를 하신 일이었다. 가방에서 담배나 또는 다른 불량한 물건들이 나올 거라 예상하셨겠지만, 내 가방은 무죄였다.


내 자신이 부모님 앞에 무죄라 그런 물건이 있을 리 없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두 분이 나를 믿지 않는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었다. 아마 편지를 받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을 영원히 모르거나, 아주 늦게 알게 되었을 것 같다. 여동생의 경우는 항상 편을 들어준 것이 고마웠다고 하였다. 그런 적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기 위해 에둘러서 몇 번 편지로 물어보고, 답장을 받고 나서야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봄에 군대에 입대해서 매미가 울고, 잠자리가 날아다니고, 간혹 한 겨울 추위를 피해 막사로 찾아 드는 그 해의 마지막 파리가 보일 때까지, 시간은 느리지만 쉼없이 흘러만 갔다. 휴가 때 집에 다녀가지만, 항상 집과 가족이 그리웠고, 짠밥이 찰수록 편지를 쓸 시간은 늘어만 갔다. 이즈음 다른 친구들도 거의 다 군대에 갔는데,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남아있는 군생활이 줄어든 기분이 들 정도로, 짧은 순간이나마 긍정적으로 변했다. 매번 편지의 마지막은, 다음에 휴가 같이 나가서 만나자로 끝냈는데, 약속이 지켜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군대를 일년 정도 늦게 간 친구가 있었는데, 모든 친구들이 짓궂게 군생활 얼마 남았냐? 이등병 주제에 반말로 편지 쓰지 마라 등등 너무 많이 놀려서 정말로 화를 내며 이러지 말라고 화를 냈는데,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난다. 불쌍한 이등병 군생활을 돕고자 더 이상 놀리는 것은 하지 않았지만, 그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겉봉 내 이름 앞에는 상병, 친구 이름 앞에 이병을 쓸 때, 자꾸 짓궂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공군이어서 복무기간도 긴데 아직 이병이라니, 웃기면서도 슬펐다.


 병장이 되고 나서는 시간이 남아돌았다. 남들이 청소할 시간, 기타 잡스러운 일을 할 시간에 휴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대장을 맡게 되어 마음 고생이 심하긴 하였지만, 편지를 쓸 시간은 넉넉했다. 분대장이 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모두 다 정말 잘 하는데 한 명 많게는 두 명이, 매번 쓸데없는 사고를 치고, 계속 속을 썩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려 6개월이나 분대장을 하였기에 누적되는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어렵고 힘든 일을 편지에 적어 보내도, 어머니와 여동생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것이었다. 힘든 것 10개 말하면 1,2개 겨우 이해해 줬었다. 슬슬 군 제대 후 생활에 대해서도 걱정이 되었는데 벌써 스물셋이나 되다니,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한 걸까? 남들보다 뒤처진 것 같이 느껴져서 자꾸 조바심도 나고,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세월이 지나서 지금 그 당시를 뒤돌아보면 다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고민이었다.


제대할 즈음에는 세면백 하나에 받은 편지가 가득 차게 되었다.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도 많고, 펜팔을 한답시고, 한두 번 생면부지인 여성분들에게 받은 편지도 꽤 되었다. 대충 200통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군 시절 내가 받은 모든 편지는 제대 후 오랫동안 보관하였는데, 나중에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렸다. 하지만, 대강의 내용은 얼추 다 기억이 난다. 내가 직접 쓰고, 받고, 몇 번씩이나 읽어 보았기 때문에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이상의 이야기가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나의 글쓰기에 대한 추억이다.




군 복무 시절 단체사진
작가의 이전글 광어와 도다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