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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거북이 Feb 20. 2021

낙동강

긴 강은 유유히 동쪽으로 흐르는데....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부산에서 대학교까지 마치고, 취업을 하게 되면서, 경북 구미에 터전을 잡게 되었고, 지금까지 15년째 구미에 거주하고 있다. 처음 구미에 왔을 때는, 부산과 비교해서 불편하거나 못한 점이 너무 많아서 항상 불평, 불만이 가득하였었다.


교통 시스템이나 백화점, 기타 문화생활에 관련된 차이가 컸었는데,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는 참기 힘든 스트레스였다. 매주 주말마다 부산에 내려왔고, 그것도 모자라서 혹 명절이나 휴가로 며칠씩 부산에 갈 수 있는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었다. 정들었던 고향과 비교하면 구미는 나에게 낯설고, 불편한 곳이었고,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그렇게 이방인처럼 살다가 구미의 삶에 적응하기까지 7~8년은 족히 걸렸던 것 같다.


부산에는 대기업이 별로 없기 때문에, 많은 친구들이 나처럼 타지로 떠나서 일자리를 찾고, 정착을 한다. 서울, 인천, 수원, 대전, 천안 등, 그런데 이 친구들 대부분이 나에게 구미는 어디 있는 곳이냐? 거기 KTX는 다니냐? 마을버스 다니는 촌이 아니냐? 이렇게 장난 반, 호기심 반으로 묻곤 한다. 낮잡아 보이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그 당시의 나는 전혀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회사와 기차역 근처만 제외하고는 지리도 모르겠고, KTX도 없고, 대중교통도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에 정곡을 찔려서 속만 쓰릴 뿐이었다.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야, 그래도 한강보다는 낙동강이 휠씬 크고 깨끗하다.” 이렇게 마지막 자존심을 내세워 대꾸하며, 쓸데없는 논쟁을 끝내곤 했었다.


구미에는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세 개가 있다. 그 중 구미대교는 출퇴근할 때마다, 남구미대교는 주말에 부산 오갈 때 건너야 했는데, 항상 이 다리들을 건너면서 이 강물은 흘러서 부산까지 가겠지, 나도 강물처럼 부산으로 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감상에 젖었었다. 웃기는 것은 정작 부산에서는 낙동강을 몇 번 보지도 못했다.


사하구, 사상구, 북구에 가야 볼 수 있는데, 도심에서 많이 떨어진 곳이고, 교통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모두들 부산이라 하면, 해운대나 다대포와 같은 바닷가를 먼저 떠올리지, 낙동강을 먼저 생각해내지는 않는다. 부산에 살면서 낙동강 한 번 보는 것보다 바다를 백 번 넘게 볼 기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낙동강의 중요성에 대해 잘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나 또한 그러하였다. 낙동강이라는 말을 들으면, 좀 개발이 덜 되고, 사람이 잘 살지 않는 변두리 지역을 떠 올리기 일쑤였다. 집에서 해운대 바닷가가 보이면 돈 많은 사람, 집에서 낙동강이 보이면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편견도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사하구 당리에 낙동 초등학교가 있었다. 중학교 때, 이 학교를 졸업한 친구가 딱 한 명 있었는데 우린 이 친구를 깡촌 출신이라고 놀렸었다. ‘낙동’이 ‘낙농’과 비슷하게 들리다 보니, 그 초등학교는 우유 급식이 공짜 아니었냐? 동네에 젖소가 있지 않았냐? 등등 지금 생각하면 좀 심하게 놀렸었다. 부산에서 낙동강은 내 기억으로는 80년대 구미에서 발생한 페놀 유출사건으로 심하게 오염되거나 할 때만 잠깐 크게 이슈가 되는 정도였었다. 구미는 부산과 다르게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주거지와 공단이 형성되어 있고, 공업용수로도 낙동강 물을 많이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부산보다 훨씬 낙동강의 활용도가 큰 것 같다.


또 하나 구미에서 낙동강을 소중히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를 치열하게 벌인 격전지와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구미와 가까운 칠곡, 왜관이 주 격전지였으며, 칠곡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쟁의 향방이 바뀌었기 때문에, 기념관과 유적도 근처에 여럿이 있다. 낙동강이 없었더라면, 아마 한국전쟁에서 우리는 졌을 것이다.


구미는 안타깝게 인민군이 들어와서 낙동강 전투 당시 미군에 의해 수없이 폭격을 받은 곳으로 알고 있고, 그 당시 구미 자체는 별로 중요한 곳이 아니어서,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다. 아무튼 구미에서 매일 보는 낙동강이 그 당시의 나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준 것은 맞다. 고향과 연결된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처럼 느껴졌지만, 내 고향 부산이랑 연결된 무엇인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사실 자연을 그대로 두면, 10년이 지나도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놀랍게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렷하고, 계절에 따라 산천의 모습이 너무 다르기에 매 계절의 모습이 새롭기에, 다시 계절이 돌아올 때면, 1년 전과 달라진 자연적인 침식, 퇴적에 의한 변화를 쉽게 알아채기는 어렵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83년 낙동강 하구둑이 생기면서, 갑자기 큰 변화를 겪었다. 재첩, 연어가 사라지고, 수많은 갈대밭도 사라졌다. 부산에 오래 사신 분들은 하구둑이 생기기 이전의 낙동강의 모습을 추억하며, 아쉬움을 그 이후 세대에게 곧잘 전하는데, 부모님께서도 나에게 그렇게 하셨다.


이곳 구미에서도 2008년 4대강 정비사업을 하면서, 많은 것이 변화하였다. 유속이 느려 졌고, 유량은 많아지고, 그 때문인지 녹조도 자주 발생한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이렇게 낙동강이 본연의 모습을 잃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4대강 사업을 통해 더 좋게 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천년 만년 넘게 흘러온 물줄기를 한 순간에 바꾸어 버려서 본연의 모습을 잃는 것이 나는 못마땅하다. 사람으로 치면, 성형수술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본연의 모습이 주는 아름다움이 더 소중하지 않나 싶다.


구미의 낙동강에서 내가 많이 본 물고기는 배스이다. 강 속에 있는 물고기를 본 것은 아니고, 여기에서 내가 본 낚시꾼들이 많이 잡는 어종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릴 적 부산에 살 때는 여름마다 인근 밀양의 낙동강에 피서를 갔었는데, 은어를 많이 잡았었다. 은어가 너무 많아서, 내가 설치한 어설픈 줄낚시에도 걸려드는 녀석이 있었다. 글쎄, 세월이 많이 흘러서 지금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낚시나 환경보호 이런 것은 잘 모르지만, 배스가 심각한 생태계 교란 어종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런 포악한 배스가 많은 것을 보면서, 이제 막 전쟁터 같은 사회에 던져진 나를 힘들게 하는 여러 사람들이 왠지 배스처럼 느껴져서 낚시군들을 항상 마음속으로 응원했었다.


은어는 강 상류에서 태어나서 강 하류로 내려와 바다로 나간 후 다시 알을 낳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온다. 은어와 다르게 ‘나는 왜 바보처럼 아직 젊은데 물 따라 하류로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여기에 정체되어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취업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일 줄 알았는데, 너무 인생을 쉽게 생각한 나 자신이 싫었고, 또 다른 도전을 하기는 겁나고, 계속 그대로 있으려고 하니 답답하고, 그런 날들이 몇 백, 몇 천일이 지나갔다.


부산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 중에 ‘낙동강 오리 알’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도 한국전쟁 당시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길 읽고, 낙오된 나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혼자 쓴 웃음을 지었던 기억도 난다. 매일 낙동강을 보니까, 이러한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낙동강과 내 인생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이런 저런 생각들을 짜 맞추어 보았는데, 은어에 대한 것만 그럴 듯하였고, 나머지 그럴 듯한 공통된 스토리는 별로 생각해 내지 못하였다.


고향에 있던 친구, 후배들도 다 어딘가로 떠나가고, 이젠 주말에 내려가도 부모님도 별로 안 반겨 주시던 즈음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미뤄왔던 결정을 하여야만 하였다. 지금 이 사람과 결혼하면 구미에 완전히 정착해 버릴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것인가? 마침 회사도 어려운 시기라 이직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었다. 심란한 마음에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퇴근 후에 걸어서 남구미대교를 지나 구미대교를 건너 매일 걸었다. 대략 13km 정도의 거리인데 방바닥에 누워서 한숨이나 쉬는 것보다는 답답함을 더는데 훨씬 도움이 되었다.


강가의 경치가 좋아서 적당히 쓸쓸함을 느끼기에 적당하였다. 강에서 보이는 공단의 밤이 만들어내는 야경도 멋있었고, 이쪽 강가 공원의 산책길과 반대편 벚나무가 심긴 자전거 길도 꽤나 아름다웠다. 한번씩 굉음을 울리며 지나가는 화물트럭이 조용한 밤 산책을 방해하기는 하였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한 것이었다. 강바람을 맞으며, 겨울 밤에 걷는 것이 원래는 고생스러운 일이었겠지만, 나는 내 몸을 고생시키면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이런 일을 하는게 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매일 밤 걷다 보니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등등, 매번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곳에서 마주치게 되었고, 당연하겠지만 그들은 나와 반대 방향에서 오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방향이면 같은 시간에 출발하지 않는 이상 마주칠 일이 없으니까.


이유가 무엇이든 밤 늦은 시간에 여길 걷는 사람이 꽤 많구나, 나보다도 규칙적으로, 열심히 걷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니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은어처럼 되려고 했는데, 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오는 은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니까 은어처럼 꼭 방향을 정해 놓고 살아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은어라고 자기가 원해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올까? 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자의 반 타의 반이지만, 최선을 다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강 건너 보이는 공장 굴뚝과 수많은 불빛들, 하늘의 별 모두가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페인트로 덧칠한 콘크리트와 불빛을 담은 네모난 유리들, 하늘 향해 쉼없이 연기를 내뿜는 공장 굴뚝들, 모든 것들이 정답게 느껴졌다. 나는 그 순간 내 눈에 속아서 쓸데없이 향수병으로 날려버린 세월이 너무나 밉게 느껴졌다.  


얼마 후, 나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고, 구미에 있는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였다.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익숙한 이곳에서 새 출발을 하는 것이 맞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더 이상 구미가 예전처럼 싫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아이들도 태어나고, 이제는 완전히 구미사람이 되어버렸다.


구미에서 사는 것이 이제 내게는 ‘소확행’이다. 서울, 부산과 같은 대도시와 비교해서 규모도 작고, 없는 것도 많지만, 반대로 구미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 곳곳에 숨어 있다. 공단 근처의 영화관에 가서, 한적하게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부산이라면 항상 강태공들이 바글거릴 낙동강의 명당 포인트도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다. 테니스, 수영, 볼링, 골프 연습, 등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즐길 수 있다. 수상스키나 보트도 낙동강 근처 공원에 가면 배울 수 있다. 평균 연령이 낮아서 그런지,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임을 만들기도 쉽고, 육아, 교육, 부동산 등에 대한 정보 교류도 원활하다.


지금도 매일 출퇴근 길에 다리를 건널 때면, 생각에 잠기곤 한다.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항상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저 강물을 때론 물살에 순응하며, 때론 거스르며, 열심히 살아가야 하겠지. 보물 같은 내 두 어린 딸들을 생각하면 또 은어 생각이 든다. 은어는 자기 새끼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강을 거스르는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어렵겠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하신 것 같이, 부모님이 하신 것 같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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