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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거북이 Feb 26. 2021

내가 겪은 최악의 면접

번데기가 나비가 되려면 죽을 결심을 해야 한다.

 15~16년 전에 경험한 수십번의 면접 중 최악의 면접



 오늘은 서울에 있는 여관에서 눈을 떴다. F사 면접을 위해 어제 밤에 서울에 올라왔다. 새벽 기차를 타고, 올라올 수도 있지만, 혹시나 컨디션 조절에 실패해서 면접을 망칠까 두려웠다.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우리나라는 기업들마저 서울이나 수도권에 편중되어 있고, 나처럼 취업이 절박하고, 능력 없는 사람은 이렇게 뭔 이동거리를 감수하면서 지원을 하고, 면접을 응할 수밖에 없다.


재빨리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어제 미리 사두었던 샌드위치와 우유로 아침을 떼운다. 옷걸이에 걸어 둔 와이셔츠와 양복을 꺼내 입고, 옷가지와 소지품은 소형 캐리어 가방에 넣은 다음 길을 나섰다.


지하철 역 사물함에 캐리어를 넣고, 면접을 보러 J사 본사로 들어왔다. 입구에 면접 안내문과 함께 화살표로 면접실이 표시되어 있다. 면접실에 들어가니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감독관 한 명만 보이고 아무도 없다. 여자 감독관인데 이것,저것 물품을 준비하고 있다. 평소의 소극적인 나답지 않게 보이기 위해 가급적 크고, 쾌활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면접 보러 왔는데 여기서 기다려도 될까요? 바쁘신 것 같은데 혹시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라고 말을 건네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다 끝났어요. 옆방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대기실 책상에 명찰 있으니까 본인 명찰 찾아서 목에 거시고, 책상 위 서류철에서 본인 이름 찾아서 사인해 주시고, 앉아계세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사무적이지만, 딱딱하지 않고, 빠르고, 또박또박하게 감독관이 대답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감독관이 아니라 J사 회장 비서였다.


옆방 대기실에는 두 명의 인사 담당자가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명찰을 찾고, 사인을 한 다음 자리에 앉았다. 긴장은 되지 않았다. 아마 어제 밤에 서울에 일찍 올라와서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한 덕분일 것이다. 아직 면접까지 시간은 많이 남았다. 머릿속으로 차분히 J사 회사 정보를 정리해본다.  J사는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 중 가장 큰 H자동차 회사의 선대 회장 조카가 회장이며, 혈연 덕에 거의 H자동차 회사에 독점 납품을 하고 있으며, 국내 시장 점유율이 40%가 넘는 유망한 회사이다.


단점은 해외 수출은 거의 하고 있지 않으며, R&D와 마케팅 부문에도 투자가 인색한 회사이다. 연봉은 우리나라 대기업 중에서는 하위권이며, 중소기업 중에서는 상위권에 속하고, 매년 30~40명의 신입사원을 뽑는 곳이다. 면접 인원이 130명 정도 되니까 3~4:1 정도의 경쟁률이 예상된다. 본사는 서울에 있지만, 공장은 지방 K도시, P도시에 있다.


 나는 이공계니까 아마 합격하게 된다면 K도시 또는 P도시로 가게 될 것이다. 회사 분위기는 보수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복도를 지나오면서 창문으로 사무실을 봤는데 정말 보수적인 회사처럼 보였다. 모든 책상이 입구 쪽으로 오와 열을 맞춰서 입구 쪽을 향해 있었으며, 맨 뒤쪽 열 책상들은 크고, 공간이 넓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관리자 급 사람들의 자리인 것 같았다. K도시, P도시의 공장은 이러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김칫국 마시는 걱정이 앞섰다.


곧 다른 면접자들도 속속 도착했고, 면접 시간이 되었다. 몇몇 빈자리도 보였는데, 일단 경쟁자가 시작도 하기 전에 줄어들었다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는 호재임이 분명하다. 빈자리는 대략 10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면접은 빨리 끝날 것 같았다. 8명씩 한 조를 이뤄 한꺼번에 입장하는데 나는 5번째 조 5번째였다. 5라는 숫자는 나에게 좋은 의미가 있는 숫자이다. 군대 전역도 5월 달에 하였고, 내가 좋아하는 축구선수 등번호도 5번이다. 잘 될 것이다. 힘내자.


면접이 진행되었고, 1조부터 차례로 면접을 보고 나왔는데 면접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면접관들이 까다로운 질문을 하는가 보다 싶었다. 드디어 내가 속한 5조 차례가 되었고, 면접을 보러 면접실로 들어갔다. 나는 아침에 일찍 와서 면접실을 들어가 봤기 때문인지 크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아침에 본 대로 면접관들이 일렬로 앉는 긴 책상이 있었고, 7명의 면접관이 차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우리가 않을 8개의 의자라 나란히 있었다. 신기한 것은 21C에 면접관들이 다 A4로 인쇄된 출력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트북이나 태블릿도 없이.


차례대로 자리에 앉았는데 앉고 나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책상 제일 끝 쪽 창가에 앉은 면접관의 행동이 이상했다. 다리를 꼬고 앉았는데 구두도 벗겨져 책상 아래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고개도 거만하게 45도 각도로 기울이고 있었는데 굉장히 귀찮은 표정이었다. 단 한 번도 이런 면접관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당황하면서도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얼굴이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예전에 신문이나 뉴스에서 보던 H사 선대 회장의 얼굴과 많이 닮은 것이었다.


‘아하, 회장이 직접 면접하러 왔구나. 나름 신경 써서 면접하려는데 생각보다 지겹고, 하기 싫어져서 저러고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의 면접관이 1번 면접자부터 압박질문을 퍼 붇고, 그 다음 2번 면접자에게 질문을 퍼 붇는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면접이 진행되었다. 나는 5번째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이미 내 앞의 4명의 면접자들이 압박질문에 당황해서 실수도 많이 하였고, 최소한 내가 실수하더라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분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해도 꽤나 만족할 수준의 무던하게 면접을 보았고, 그렇게 8명 모두의 차례가 지나갔다.


8번부터 일어서서 문을 나가기 시작하는데 면접 내내 핸드폰을 계속 들여다보던 회장이 갑자기 가기 앞의 서류를 홱 끌어당겨 훑어보고는 갑자기 볼펜으로 중간쯤에서 가로로 줄을 홱 그었다. 그리고는 위쪽으로 화살표, (내가 볼 때 틀림없이 화살표였다.)를 그어 올리고는 다른 면접관에게 서류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야, 여기까지 합격시켜.”


나는 너무나 놀라서 충격을 받았고, 마침 회장이 그 말을 할 때 내가 문고리를 잡고 면접실을 나가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순간 너무 놀라서 잠시 동안 문고리를 잡고는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려 회장을 쳐다보았다. 이게 뭐란 말인가? 그럼 처음부터 뽑고 싶은 순서대로 명단을 작성하고, 이걸로 채용이 끝났다는 뜻인가? 그럼 지금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80명 가까운 인원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그 사람들은 이 상황을 모르고, 아무 의미가 없는 면접을 보아야 한다는 뜻인가? 이건 정말 아니다. 난 문고리를 잡고 심호흡을 하였다. 4번 면접자도 이 말을 들었는지 문 앞에 서서 돌아서서 안쪽을 넘겨다보고 있다.


이건 너무하다. 너무 화가 났지만, 나는 냉철하게 상황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자, 회장이 분명 중간쯤에서 줄을 그은 다음 위쪽으로 화살표를 하고, 여기까지 합격이라고 했으니, 저 서류에 면접자 전체 명단이 있다면 130명 정도 인원 중에 내가 37번째니까 나는 합격일 것이고, 만약 저 페이지가 우리 조 8명의 명단이라면 나는 8명 중 5번째니까 줄 위냐, 아래냐에 따라 합격, 불합격이 된다. 어느 쪽일까? 전자이길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분노는 이미 사라졌다.


회장이 건넨 서류를 받은 면접관이


“네,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앞으로 4장을 넘겼고, 그게 다였다. 4장 앞의 페이지는 없었다. 후자의 경우구나. 젠장. 난 50% 확률이네. 아니지 딱 중간에서 선을 그었으니 내 앞까지 합격이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8번째 면접자가 조용히 방안의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그러나 나지막하게 “씨발”이라고 말하였다. 그 말 덕분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정말 길고도 피곤하게 느껴진다. 기억이 나는 건 회장 비서의 예쁜 얼굴과 회장의 가로줄과 화살표 긋는 모습, 그리고. “씨발” 이것만 계속 머리에 떠오른다. 떨어지기만 해봐라. 취업게시판이란 게시판에는 후기 다 올려버릴 테다 이렇게 마음먹었다.


일주일 후, 나는 J사 홈페이지에서 내가 최종 합격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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