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웰다잉
한 남자가 있다. 유망한 변호사, 잘 생긴 청년, 멋진 애인, 그리고 꿈꾸던 자리로 갓 승진한 야망의 나날들. 남부러울 것 없는 그에게 어느 날 몸에 나타난 반점들은 그의 삶을 나락으로 보내기에 충분했다.
<필라델피아(1993, 조너선 드미 감독)>는 후천성면역결핍증에 걸린 동성애자 변호사 앤드류(톰 행크스)의 법정투쟁기이다. 내가 영화를 많이 보러 다니던 20세기의 시절, 톰 행크스는 매우 빛이 나는 배우였다. (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 <빅(1988, 페니 마셜 감독)>은 수집벽 없는 내가 DVD를 찾아 헤맨 정말 사랑스러운 영화이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 노라 애프론 감독)>은 영화 채널에서 방송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 어디서부터건 상관없이 또 보게 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도 그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전형적인 백인 남성 변호사에서 ”에이즈“(당시에는 후천성면역결핍증을 이렇게 불렀는데 호모포비아를 드러내는 차별적 병명이었다.)에 걸려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야윈 청년까지 연기해서 커다란 호평을 받았다. 거만하고 역동적인 인간이 어떻게 파르르 떨며 항변하는 인간으로 변해가는지를 보면서 세기말의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숨기려 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말콤 X(1992, 스파이크 리 감독)>도 좋아하기 때문에 <필라델피아>의 다른 주연 배우인 덴젤 워싱턴도 기대를 많이 했는데, 남는 것은 온통 앤드류가 당혹스러움으로 눈을 깜박이는 장면, 앤드류가 도서관에서 법전과 공기(air)를 읽는 장면, 앤드류가 어느 틈에 바짝 여위어 있는 장면 등 온통 앤드류의 장면들이다. 그러나 절대 덴젤 워싱턴이 연기를 잘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앤드류라는 인물에 더 가까이 다가갔기 떄문이었다.)
주인공이 죽는 영화는 흔치 않지만 앤드류는 영화 속에서 죽는다. 자신을 교묘하게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는 호모포비아와 싸우다 죽고, 아무도 도우려고 하지 않는 법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다 죽고, 환자로서 보호받지 못한 채 병세가 악화되어서 죽는다. 그의 장례식이 영화의 에필로그인데, 그 장면은 이 영화를 기억에 오래 남게 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웰다잉을 말하고 다니기 시작할 무렵 가장 먼저 영화 레퍼런스로 택한 것이 이 장면이었다. 꼭 이 장면을 보면서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앤드류의 집에 모여서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그를 기억하고 추모했다. 얼마나 따뜻하고 평화로운지 술과 화투가 난무하던 장례식장의 풍경에 익숙하던 나는 이런 게 가능한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앤드류의 애인(무려 안토니오 반데라스!)은 그의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위로받았고, 친척들은 앤드류의 어린 시절 비디오를 보면서 그의 반짝이는 시절을 추억했다. 관객으로서 나는 영화 내내 그의 처절한 사투를 보며 애통해했지만, 마지막에 그의 장례식으로 마음의 치유를 얻은 것만 같았다.
앤드류의 삶은 법정에서처럼 모멸적이고 참혹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충만한 삶이었다고 그의 장례식이 말해주고 있었다. 삶의 마지막에 힘든 싸움을 했다고 그의 삶이 통째로 망가진 것은 아니다. 장례식은 앤드류의 삶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공간이 되었다.(가끔 정서적인 피로감과 자괴감에 시달릴 때면 이 장면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곤 한다.)
얼마 전 대흥행을 했던 영국 영화 <러브 액추얼리(2003, 리처드 커티스 감독)>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옴니버스영화의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첫사랑에 빠져 처음 겪는 종류의 가슴앓이를 하던 소년의 어머니 장례식이다. 소년의 아빠이자 고인의 남편은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내와 저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준비해 왔습니다.“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이 나왔다. 이게 가능해? 병에 걸려 어린 아들과 남편을 두고 가야 하는 여자가 자기 장례식에 어떤 음악을 틀고 어떤 농담을 할 것인가를 남편과 어떤 기분으로 이야기했을까? 나는 우리가 말하는 ”웰다잉“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장례식을, 죽음의 순간을, 죽음 이후를 살아 있을 때 많이 이야기하고 준비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야 좋은 장례식, 좋은 죽음을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앤드류의 장례식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닐 영의 ”Philadelphia“를 던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HpQFF_Et4s&list=RDIHpQFF_Et4s&start_radi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