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ing Who?”

죽음이 삶에 들어왔다

by 노리

건강한 아가로 태어나 건강한 아이로 자랐고, 건강한 청소년을 지나, 줄곧 건강한 어른으로 살아왔다. 두통, 치통, 생리통 모르니 흔한 진통제조차 먹을 일이 없었고, 감기는 종종 걸렸지만 평소처럼 조심성 없이 살아도 두어 밤 자면 싹 나았다. 심지어 치아도 튼튼해서 앞니로 온갖 바짝 마른 것들을 뽀독뽀독 씹어먹었다. 약값과 병원비를 쓰지 않으니 사는데 드는 돈이 적어도 되었고, 한마디로 건강은 돈 버는 재주가 신통치 않은 나에게는 제일가는 자산이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내 나이 60을 바라보고 있는 이때, ‘어디가 아프다’는 상태의 실체-예를 들면 체했다거나 몸살감기라거나 하는 것의 상태-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몇 년 전 여행지 통영에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꿀빵 여섯 개를 한 번에 밀어 넣었던 밤을 잊을 수 없다. 집에 돌아와 편히 자려 했지만 밤새도록 목에서부터 배꼽까지 꽉 막힌 느낌에,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고, 토하려고 손가락을 넣어봐도 술 취했을 때처럼 쭈악! 나오기는커녕 사고 난 터널처럼 정지한 채 도통 뚫리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친구에게 되는대로 설명하니 딱 한 마디로 정리해줬다. “체했었나 보다.” 그 순간 내가 체하기도 하는구나 하는 것이 충격이었다.


나이를 더 먹고 얼마 전 충치가 염려된다며 사랑니를 죄다 뽑은 후 잇몸에 힘을 주는 느낌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충격 이상이었다. 이제 몸 여기저기가 예전 같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선전포고처럼 다가왔고, 그것은 마치 곳간이 털린 느낌이었다. 나는 이제 뭐를 믿고 살지? 건강 하나 믿고 살던 인간이 건강염려증을 얻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병원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해본 적 없으니 할 줄 모르고, 할 줄 모르니 걱정만 느는 것이다.


지난 달 나는 또 충격에 휩싸이는 일을 겪었다. 이 충격의 종류는 또 처음 겪는 것이었다. (이 글의 발단이 되는 일이다. 아픈 걸 넘어서 죽음까지 생각하게 된 일이다. 그날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일이다. 혼자 잘 살아가다가 불현듯 내 처지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 일이다.)


사우나에 다녀온 밤부터 감기 기운을 느꼈다. 나에게 감기란 목이 좀 아프고, 콧물이 좀 많이 나는 현상으로서 대략 100시간을 못 넘기는 가벼운 것이어서 그날도 별 생각 없이 잠을 청했다. 다만 콧물이 많이 나와서 머리맡에 두루마리 휴지를 놓고 코를 틀어막으며 자려고 했다. 방이 건조해서 그런가 보다 하면서도 귀찮아서 오늘만 일단 자자 하고 눈을 감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허리가 쌩쌩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며칠 지나면 저절로 괜찮아지려니 한 것이다.


원래 잘 때 모로 눕기를 좋아하고, 한쪽으로만 오래 누우면 균형이 나빠질까 이리저리 몸을 자주 뒤집는 편이다. 그날도 유튜브를 보다가 몸을 획 뒤집는데, 갑자기 시간이 정지한 듯한 순간이 발생했다. 허리가 아파서 숨이 멎을 것 같았고, 상체만 돌아가고 다리는 못 뒤집은 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이게 뭐지?

왜 안 움직이지?

내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거야?

내일 아침이 되어도 못 일어나는 거야?

이렇게 누워서 아무 것도 못 하는 거야?

밥도 못 먹고 이렇게.................... 굶어 죽는 거야?

정말 이렇게 죽는 거야?

죽어서 발견된 독거노인이 되는 거야?


그렇다. 나는 혼자 사는 노인이다. 아직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는 없지만 그들을 보며 내 가까운 미래를 엿보는 중이다. 젊어서 가족에 못되게 굴었고(보편적인 관점에서 내 원가족은 죄가 없음) 진즉 못되게 굴 가족을 만들지도 않았으며(보편적인 관점에서 나는 부모보다 기가 쎘음), 혼자서 삶을 돌보고 처리해온 것에 자부심을 가지며, 늙어가면서도 혼자서 살지 말아야 될 이유에 둔감했다. 한마디로 혼자 결핍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려는 듯이 곁에 사람을 두지 않고 살았다. 가끔 하우스메이트가 있던 적도 있었지만 방세 같은 현실적인 문제의 분담이었고, 철저히 삶의 기조는 “all by myself”였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혼자 죽는 현장을 상상하자 두려움이 끼쳐왔다.


생각해보면 ‘사는 일’은 혼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간혹 안쓰럽게 여기는 이의 시선만 적당히 뭉개면, 조언이랍시고 해주는 오지랖에 적당히 대응만 해주면. 그런데 ‘죽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다. 늙어가다보면 내가 사는 일을 혼자서 할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므로.


그런 순간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은 가족을 부르겠지, 가족과 떨어져 사는 사람은 가족에게 전화를 걸겠지. 가족 간의 결속이 전 세계 상위 5%에는 들지 않을까 싶은 우리나라에서 그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나는 염치없이 가족을 부를 수 없다. 우리 언니는 가족의식이 유난히 강해서 나를 돌볼 의사가 분명히 있을 테지만, 나는 절대 언니에게 전화를 걸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누구에게 전화를 걸지?


나는 적어도 배설물을 묻힌 채 발견되는 것은 막고 싶어서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비록 사회성이 부족하고 인간관계가 좁다 해도 내 폰속에 연락처가 세 자리는 넘었다. 그러나 적당한 전화번호 하나를 골라낼 수 없었다. 가족 말고 친구는? 내 친구들 이름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어볼까도 했지만, 결국 가족에게 맡길 수 없는 것을 친구에게 맡기는 것은 더욱 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들은 자기 가족을 돌보는 것이 먼저이고, 여럿 중의 하나인 친구에게 가족처럼 해줄 특별한 하나가 되어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아마도 행정기관을 통해 부고를 듣게 되면 놀라겠지, 슬퍼하겠지, 어쩌면 원망할지도 몰라. 나는 그들을 위해 폰에라도 남겨놓을 문장을 만들었다. 친구들에게 “내가 요청하지 않은 것에 응하지 못했다고 슬퍼하지 마.” 수십 년이 지나 근래 겨우 사이가 좋아진 언니에게는? “이런 앤 줄 알잖아. 슬퍼하지 마.” (그것이 슬픔을 줄여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었다. 오히려 끝까지 쎈 척 한다고 화를 낼지도..)


(다행히? 역시나?) 나는 죽지 않았다. 두려움을 견딘 상으로 나는 살아났다. 다음날 이불 밖으로 엉금엉금 나올 수 있었고, 일주일쯤 지나자 감기도 허리통증도 거의 없어졌다. 죽을 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유증이 남았다. 몸이 아니라 머리에. 내가 스스로를 돌볼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대책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혼자 사는 사람이라도 잘 죽기 위해 어떤 수단을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밤마다 천장을 뒤덮었다.


죽음을 미룰 수 없으니 혼자서도 잘 죽는 방법을 지금부터 찾는 수밖에 없다. 앞으로 혼자 늙어가다가 혼자서도 잘 죽는 방법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특히 여자 혼자 살아가고 늙어가면서 혼자서도 잘 죽을 준비를 하는 이야기 말이다. 죽음을 생각해야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는 믿음으로 “죽음이 삶에 들어왔다”고, 그것이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데 힘을 보탤 것이라고, 그러니까 걱정 말고 죽음을 이야기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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