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웰다잉
0세기의 끄트머리에 보았던 한국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허진호 감독)>를 아주 좋아했다. 보면서는 뭔가 말랑말랑하고 아스라하고 간지러웠고, 보고 나서는 안타까운 여운이 길고 깊게 남았다. 담백한 척 하지만 끈적한 조청처럼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고 감겨오는 감정이 있었다. 주인공치고 스멀스멀한 캐릭터인 정원(한석규)은 한국영화가 찬란하던 시절, 그 안에서도 아주 찬란하게 빛나던 배우였다. 그는 영화 속에서 가끔 죽었는데, <초록물고기>에서는 아련하게 죽었고, <구타유발자들>에서는 얻어맞아 죽었다. 이 영화에서는 수백 수천 개의 얇은 바늘이 달린 솔이 목덜미를 쓰다듬는 것처럼, 처음에는 간지럽기 시작해서 어느새 송송 피가 맺히더니 결국은 깊은 아픔을 주면서 죽었다.
이 영화로 얼굴만 반반한 것 같던 심은하가 비로소 배우로 여겨졌고,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들이 말하는 ‘5분 법칙(영화 초반 5분 안에 관객의 흥미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영화계의 불문율)’을 보란 듯이 어기는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구나, 내 취향을 깨달았으며, 정원(한석규)과 다림(심은하)의 엇갈리는 가혹한 인연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영화라는 요물에 감탄했다.
주인공이 죽는 영화라고 말해버렸으니 조금 상세히 말해보자면, 정원은 서울 외곽 동네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가던 30대 초반의, 감정은 세심했지만 연애는 시원찮은, 거절 못하는 착한 심성이 답답해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위중한 병을 가지고 있지만 가족이나 친구, 어느 누구에게도 이것을 말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누가 “나 곧 죽는다”는 말을 주변에 할 수 있었을까? 가끔 분노가 터져 주변을 놀래키지만 결국 무념무상한 듯한 표정으로 혼자서 조금씩 자신의 부재(不在)를 살아갈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준비를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 장면이 그렇다.
그 와중에 봄바람처럼 다가온 주차단속요원 다림과 관계가 진전하며 솜사탕처럼 행복이 부풀어간다. 그런데 날로 악화되는 병세는 그의 행복을 방해하는데, 정원은 자신이 죽어간다는 것을 차마 다림에게 알릴 수 없었고 아무 말 없이 그녀 앞에서 불쑥 사라져버린다. 알콩달콩 관계를 만들어나가던 사람이 일언반구 없이 사라진다?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다림은 원망과 상처를 깊이 묻은 채 어쩔 수 없이 일상을 살아간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 정원을 내도록 기다리다가 다림이 사진관의 창문에 돌을 던지며 울먹이는 장면이었다. 주차단속을 하며 살아가는 건 고되었지만 사진관 아저씨를 만나면 즐거웠다. 놀이공원에 놀러 가서도 방귀 이야기에 혼자 비실비실 웃는 아저씨가 재미있었다. 다른 사진관은 안중에도 없이 그곳만 자꾸 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라졌다. 도대체 어떤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대놓고 연애를 벌이던 사이는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아저씨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내 마음을 몰랐던 걸까? 나를 안 봐도 아무 상관없다는 건가? 이대로 아저씨를 영영 못 보는 건가?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질문이 오갔겠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도 없는 빈 사진관에 주먹보다 작은 돌을 던지는 것뿐이었다. 조각조각 파편으로 흩어진 창문을 바라보는, 분노라든가 원망이라든가 이렇게 선명한 감정으로 말하기 어려운 다림(심은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소리 없이 역류하는 개울물처럼 훌륭한 연기였다.
이 영화를 본 후로 25년이 더 흘렀다. 시대는 많이 변했다. 세기말을 겪었고 밀레니엄도 지났으며 메타버스의 시대가 되었다. 나도 변했다. 오십을 훌쩍 넘겼고, 공교롭게도 코로나팬데믹을 지나면서 몸과 마음이 급격히 늙어서 스스로 노년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 노인이 되어 다시 본 <8월의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좋은 영화였지만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새로운 장면들을 들이밀었다. 예를 들면 평소 순둥하기 그지없던 정원이 불알친구와 술을 먹고 취해서 경찰서에서 난동을 부리던 장면이라든지, 심지어는 영화 초입에 정원이 텅 빈 학교 운동장에 앉아 있던 장면조차 그랬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깊은 탄식을 자아냈던 장면이 있었는데, 정원이 아버지(신구)에게 비디오데크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이었다. 아버지는 영화 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고 정원은 아버지를 위해서 비디오녹화를 해주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스스로 하라며 정원이 아버지를 다그친다. 아버지가 무심하게 “네가 해주면 되잖아.”라고 안 배우려고 하자, 급기야 정원은 아버지에게 버럭 화를 내며 방을 나가버린다. 이때 아버지는 “쟤가 갑자기 왜 저래?” 라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술 취해서 난동을 부리던 정원을 뜯어말렸던 친구가 그랬듯.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친구도 아버지도 정원이 왜 안 하던 짓을 하는지를. 그러다 정원이 죽고 나서 알게 될 것이다, 정원이 왜 그때 그랬는지를.
나이 오십이 넘으면 현실에서 숱한 죽음을 경험한 후다. 젊어서 죽는 청년은 영화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 잘 알고 있다. 부모의 죽음이 뇌구조에서 면적을 넓혀가고, 정원처럼 평균수명을 깎아 먹는 친구들의 죽음도 경험하고, 이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기 시작한다. 오로지 ‘삶’만 고민하던 시절을 지나 반환점을 돌면 ‘죽음’을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내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했던 일들을 현실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아버지의 깊은 회한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누군가의 죽음이 부정적인 감정을 남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까? 정원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가족들과 이야기하며 그 감정을 줄일 수는 없었을까?
정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죽음 앞에서 극심한 감정의 동요를 겪다가 점차 죽음을 받아들인다. 사진사였던 사람답게 그는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어 남긴다. 늘 카메라 뒤에서 피사체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처음으로 카메라 렌즈 앞에 앉아 스스로 영정사진을 남길 때 희미하지만 평온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는다. 이제 이 영화는 살랑거리는 로맨스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죽음’에 대한 영화로 보인다. (영정사진을 남기는 것은 딱 20세기식 죽음의 준비다.)
그러나 아무리 영정사진이 웃고 있다고 한들 남은 사람들의 회한을 막기는 역부족인 듯하다. ‘죽음’은 가는 사람의 것이기도 하고 남는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삶이 흔들렸던 경험은 흔한 것이다. 정원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죽음을 알리고 준비를 함께 할 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죽음은 금기어처럼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다.
작년 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아일랜드 영화 <갈보리(Calvary, 2014)>를 봤다. 평소에 아일랜드 영화를 볼 일이 드물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다. 카톨릭 사제가 주인공이며 작은 어촌에서 벌어지는 일을 중심으로 구원과 용서에 대한 탐구를 다룬 영화였다...고, 만일 이 영화를 25년 전에 봤다면 그렇게 생각했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는 따로 있었다. 죽음이 가까워 보이는 한 노인이 주인공 사제에게 한 대사다. (기억에 의존한 것이어서 워딩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언제 느끼는 줄 알아요? 주변에서 아무도 나에게 죽음을 말하지 않아요.“
서울 신림동에 있는 작은 주민도서관 관장님과 그 동네 노인들을 위한 영상미디어워크샵을 기획한 적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 죽음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하고 싶은 말들을 남기는 영상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는데, 예산을 확보하지 못한 채 상황이 어려워져서 진행하지 못했다. 그때 ‘시니어를 위한 웰다잉문화프로그램’에 공감대가 남달랐던, 나와 동년배이던 관장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제 어머니에게는 하라고 말씀드리지 못할 거 같아요.“
그녀의 어머니는 80대였는데 잘못 말했다가 사이가 어그러질 것 같다고도 했다. 나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었다.
죽음을 가장 많이 고민하고 있을 사람들이 죽음을 말하기 어렵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노인들이야말로 가장 알차게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을 것이다. (오해가 있을까봐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죽음을 말한다는 것은 죽을 방법을 찾는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말한다. 죽음의 순간까지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이 죽을 수 있을까를 말하는 것이다.) 시간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시간을 가장 후회 없이 쓸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백세시대라도 50이 넘으면 반환점을 돌아 피니시에 더 가까워지는 주자처럼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인데, 얼마나 멋있게 골인할지를 말하고 생각하고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죽음을 말하고 싶다. 그래야 죽음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무섭지 않을 것 같다. 죽음이 무섭지 않아야 죽을 때까지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불과할 뿐이니까. 죽음은 입에 올리는 순간 저승사자를 불러오는 주문이 아니니까. 죽음을 생각하면 삶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니까. 오히려 열렬히 말하고 싶다. 20세기에 정원은 자신의 죽음을 말할 수 없었지만, 21세기의 나는 죽음에 대해, 잘 죽기 위한 방법에 대해, 말을 계속 하고 싶다. 내 부모에게 직접 말할 수 없어도 사회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된다면 부모에게 말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죽음’은 삶을 다르게 만든다. 새로운 것을 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깨닫게 한다. 늙으면서 지혜로워지는 것이 이 때문일까? 늙으면 안경이 2개 생긴다. 돋보기안경과 ‘죽음’이라는 안경. 게다가 내가 <8월의 크리스마스>를 ‘죽음’이라는 안경으로 새롭게 보게 된 것처럼, 좋아하는 영화라는 안경까지 덧붙여 나이 들면서 새롭게 보이는 영화 얘기, 영화 속 죽음과 웰다잉(Well_Dying) 이야기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