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경의 그림책 편지] 자이메 페라스 ‘기계세상’
수많은 그림책을 읽는 동안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 때 이 글을 씁니다. 이번 글은 좋은 그림책은 독자가 알아봐 줄 거라는 믿음으로 4년째 '그림책만' 만들고 있는 그림책공작소 민찬기 대표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 기자말
지난 4월이었나요? 우리가 서울 마포 합정동 그림책학교 강의실에서 우연히 만난 날이. 그날 대표님은 "글자 없는 그림책은 정말 안 팔린다"라고 하시면서도 "그림책공작소 31번째 책으로 글자 없는 그림책 <기계세상>을 세상에 내놨다"며 '허허' 웃으셨죠. "좋은 책은 손익계산 따지지 않고 냅니다, 돈이 안 된다고 내고 싶은 책을 출간하지 않는 건 그림책공작소의 정신과 맞지 않는 것 같아요"라고 말은 하셨지만 속으로는 울고 계셨던 거 맞죠?
대표님은 이 책을 계약할 때 발행일을 정해놨다고 하셨어요. 무조건 4월 23일! 그날이 '세계 책의 날'이기 때문이라면서요. 그 이야길 들으며 그걸 누가 알아줄까 싶은 게 제 솔직한 속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표님, 송구하게도 이런 마음이 처음은 아니었어요.
그림책 <비에도 지지 않고>를 홍보하기 위해 홍대 앞 사거리에서 비를 흠뻑 맞은 채 그림책을 들고 있던 그 사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또 작년엔 큰 교통사고로 8일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나신 일도 있었지요. 그런데도 대표님은 2018 볼로냐 도서전에서 라가치 상을 받은 작품에 대한 걱정뿐이셨나 봐요. 상을 받기 전에 계약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교통사고로 출간이 무기한 미뤄진 상황이었기 때문이었겠죠.
작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던 대표님은 기어이 이 그림책 한 권을 내려고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쓰고 있다면서 저를 보러 오셨어요(그날 먹은 물냉면이 생각나네요). 그렇게 주변에서 온갖 걱정을 들어가며 만든 책이 <여름 안에서>였습니다.
다시 태어나(?) 그림책을 만든 기념으로 <여름 안에서> SNS 인증샷 이벤트도 여셨죠. 1등에게는 그림책공작소에서 출간한 그림책 모두를 주는, 1인 출판사에서는 보기 힘든 역대급 이벤트였어요. 그날 저는 '그림책 책 한 권 내서 얼마나 버신다고 이러시는 건지... 대표님 그 마음 누가 알아주냐고요' 하고 말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습니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독자 선물로 작가 솔 운두라가의 그림을 액자로 걸어둘 수 있게 따로 포스터도 제작하셨잖아요. 포스터를 반으로 접고 싶지 않았는데, 배송비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어서 발송해야 한다며 아쉬워하셨던 게 기억나요. 그때도 대표님의 그 마음을 누가 알아줄까 생각했어요. 이런 제 마음을 눈치채셨는지 대표님도 말씀하셨죠. "누가 이런 제 마음을 알겠어요"라고요.
인정 인정. 저는 인정해야 했습니다. 대표님은 좋은 그림책을 만들고, 알리고, 팔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요. 그건 한마디로 그림책에 대한 대표님의 열정이었습니다. 그것 말고는 대표님의 이상한(?) 행동을 설명할 다른 말은 없어 보였어요. 그것이 제가 그림책 공작소의 책들을 매의 눈으로, 때로는 부드러운 눈길로 지켜보는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요.
그런데 대표님,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이신 건가요? 책방을 위한 굿즈라고요? 그림책 판매를 위한 굿즈가 아니고 동네 책방을 위한 거라고 들었습니다. 대표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림책만 만들면서 4년 동안 망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각 지역에서 불편하지만 직거래를 해주는 작은 책방들의 도움 때문이었어요"라고요.
그래서 세계 책의 날을 맞아 <기계세상>을 출간하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동네책방에 띠지를 500개씩 제작해서 보내드릴 거라 했지요. 그것도 책방마다 디자인을 달리해서 맞춤형으로요! 이를 위해 대표님은 지난 4월 그림책공작소와 직거래하는 전국 50여 곳의 책방에 이런 메일을 보내셨다 했어요.
"그림책 <기계세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책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책 뒤표지에 원서에도 없는 한 문장을 넣었습니다. '우리에게 책이란?' 이것은 제가 여러 책벗님들께 전부터 직접 묻고 싶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결국 기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책이란 무엇인지, 책방에서 생각하는 책이란 무엇인지 생각하시는 책의 의미를 15글자 내외로 보내주세요."
마치 대표님의 마음을 안다는 듯, 이 질문에 화답한 책방지기들이 생각하는 책의 의미들 한 문장 한 문장이 다 감동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책이란?
너하고 나 사이
완벽한 여행이다
이 세계를 사랑하는 일
삶과 사람을 꽉 끌어안는 것
어루만짐이다
숨어 있기 좋은 방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
우리를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살게 하는 힘
내 삶을 채워주는 친구
누군가의 인생을 통째로 만나는 것
같이 읽어야 가치 있는 것
함께 가야 하는 친구
영양 만점 노른자다
...
"카톡이 올 때마다 얼마나 신났는지 모른다"던 대표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이 간단해 보이는 작업이 무려 두 달이나 걸렸다고요. 신간 그림책 <전쟁>을 준비하며(전쟁에 관한 그림책이니까 이 책은 반드시 6월 25일에 나와야 한다고요? 아 정말!) 동네책방 띠지 작업까지 그야말로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후일담도 들었습니다. 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매번 사서 고생이신 대표님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대표님 지금 웃고 계신 거 맞죠? 그렇게 좋으신 거예요?
대표님은 이 책을 만들면서 "책이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책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곧 책의 구매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계셨죠. "아이들이 창의력 있는 인재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과 달리 부모들은 글자 없는 그림책을 사는 데 지갑을 열지 않아요, 텍스트에 익숙한 부모 세대들의 한계죠"라는 대표님 말에 저부터 어찌나 찔리던지요.
"궁극의 그림책은 글자 없는 그림책"이라는 대표님 말을 떠올리며 <기계세상>을 봅니다. 빌딩 숲과 차 숲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표정 없어 보이던 소년이 할아버지가 준 선물을 보면서 어찌나 활짝 웃던지요. 그 변화의 순간은 어떻게 찾아왔을까요? 제게도, 제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대표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겠죠? 아, 그러고 보니 대표님. 대표님이 생각하는 책의 의미는 뭔가요? 다음에 만나면 꼭 대답을 꼭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