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시민기자를 만나면서 생긴 자신감
언젠가 '인정욕구'에 대해 한 선배랑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난 이런 것도 인정 받고 싶을 만큼 쫀쫀한 사람이야' 하는 배틀에 가까운 대화가 가감없이 오갔다. 인정욕구 때문에 생긴 웃픈 이야기들을 선배와 솔직하게 나누면서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한 거구나 싶었다.
지금보다 어렸을 그때의 나는, 나보다 열 살 가까이 나이가 많은 선배도 인정욕구때문에 힘들어한다는 말에 조금 위로 받았다. 우리 모두 한낱 그런 '인간'이라는 점이 다행스럽고 좋았다. 그때의 나는 '인정욕구'라는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니까. 매일매일 나를 괴롭히고, 상처 난 곳을 계속 후벼 파고 있었으니까. 내가 힘든 것조차 알아주지 않는다고 매일 구덩이를 파고 파고 또 파고 나만의 굴로 들어가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엄연히 다른 일인데 취재기자 직군과 편집기자 직군을 비교하는 게 싫었다. 편집기자도 뉴스를 잘 다루는 기자와 그렇지 않은 기자로 비교하는 게 싫었다. 각자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그때의 나도, 조직도 인정하는 데 서툴렀다. 롤은 언제나 중요하고 시급한 뉴스에 맞춰져 있었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인가, 없는가는 크게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인가, 아닌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인정해야 했다. 지금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할 때라는 걸.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에는 '정치사회 뉴스만 뉴스인가? 사는이야기도 뉴스라고!' 하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나는 주류의 뉴스보다 그렇지 않는 뉴스를 다루는 게 재밌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없는 게 회사다. 내 취향에 맞지 않고, 나는 재미없는 일이지만 해야 했다. 냉정하지만 현실을 자각해야 했다. 이 회사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직원이라는 현실!
그런데 인생이 참 얄궂다. 하기 싫은 일도 이왕이면 '잘' 하고 싶은 오기가 생긴다. 하기 싫은 일이라 제대로 못할 것 같지만 막상 또 하다보면 요령도 생기고 전혀 뜻밖의 성과도 나오더라.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건' '너'만이 아니었다. 일도 그랬다. 일을 진심으로 대하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종종 화가 났다. 편집기자의 일은 (상대적으로!) 취재기자들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 후배들에게 '편집기자 실명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편집기자의 노동을 '당당히' 알리고, 시민기자들과 상시적으로 소통하는 데 도움을 주며 또 내부적으로 편집기자 평가의 근거로 삼고자 오랜 논의 끝에 편집기자 실명제를 시범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2015년 초의 일이다. 그리고 4년 후인 2019년 10월 28일자로 폐지했다.
내가 편집기자 실명제 폐지를 받아들인 건 처음 그것을 제안했던 4년 전과 지금은 업무와 상황이 내외부적으로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분야별 전담부서가 생기면서 편집기자 실명을 거론하지 않아도 이 분야의 기사를 누가 검토할지 대부분의 시민기자가 인지하고 있다. 또 소통해야 하는 시민기자 폭이 좁아지면서 편집기자와의 피드백도 원활해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 과정에서 내가 한 모든 유무형의 경험이 '약'이 됐다. 인정욕구에 빠져 허우적대던 내가 이 약을 먹고 많이 치유되었다. 남들의 인정 따위는 거의 생각을 하지 않고 살 만큼.
따져보니 오마이뉴스에 입사해서 내 판을 벌려 뭔가를 하기까지 10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회사에서 맡아서 해보라고 하는데 딱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때 마음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 돌아보건대 적당한 시기였다. 애 둘을 낳고, 3시간 장거리 출퇴근 직장맘에게 10여 년은 어찌보면 길지만 또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판을 벌였으니 뭐든 해야지. 시민기자와 공통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획을 제안하고, 제안한 기사가 들어오면 검토하고 배치되는 그 모든 과정이 좋았다. 또 다양한 글쓰기에 대해, 그간의 편집 경험을 시민기자들에게 조금씩 이야기하고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나란 사람의 효용성에 대해 새삼 다시 알게 됐다. 회사에 앉아서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한번의 좋은 경험은 반복을 부른다. 시민기자를 만나고 오면 없던 기운도 펄펄 났다. 이것도 써 보라고 저것도 써 보라고 하면 잘 귀담아 들었다가 도전하는 시민기자들 모습을 보면서 뿌듯했다. 직접 만나서 수다에 가까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민기자들이 "이런 것도 기사가 되나요?" 하며 묻는 아이템들이 내 눈엔 다 기사거리였다. 뭐든 하면 좋겠다는, 하면 잘 하실 것 같다는 그저그런 뻔한 말도 시민기자는 진심으로 들어줬다. 결국엔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40대 중반 직장인 모임에 참가했던 이훈희 시민기자의 연재 '존버가 목표입니다'가 그랬고, 신소영 시민기자의 '30대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도 이주영 편집기자가 그간의 깊은 소통 과정을 통해서 잘 쓸 수 있는 아이템을 캐치하고 제안해서 나온 연재다. "기자님, 30대인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주세요"라고 말했다고.
이런 과정을 통해 내 인정욕구는 자연스럽게 '밖에서' 해소되었다. 더이상 조직 '안에서' 나 혼자 지지고 볶을 이유가 없었다. 시민기자 속으로 들어가니 나도 좋고 시민기자도 좋았다. 그럼에도 때때로 조금 외롭다고 느낄 때도 많았다. "마음에 맞는 동료가 없구나?"라고 친구가 물었을 때까지는 이유를 잘 몰랐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방황하던 내 마음을 '그랬구나' 하고 이해하게 됐다. 그래도 잘 견뎌왔다고 토닥이고 토닥였다.
친구 말대로 이 조직 안에서 나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큰 뉴스가 아니라 작은 뉴스도 소중하게 대하고 키우고 싶은 사람들이 그리웠다. 나와 비슷한 연차의 동료들은 다 바빠 보였다. 나와는 다른, 각자의 고민으로 바쁘고 힘들고 지쳐보였다. 내 고민을 함께 나눌 만한 여유가 없어 보였다. 다들 진심으로 각자 짊어진 역할을 잘해내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는 자꾸만 내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어쩌면 그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을까? 좀 더 여유를 보일 걸. 틈을 보일 걸. 해결은 못해도 들어줄 수 있다는 마음 좀 내비칠 걸.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안에도' 함께 고민하는 동료가 있고, '밖에는' 시민기자들이 아군처럼 서 있다. 내가 비교적 즐겁게 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내가 4년 전 내가 간절히 바랐던 편집기자 실명제는 소명을 다했다. 굿바이, 편집기자 실명제. 미련도 후회도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