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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경 Jun 23. 2024

일단 나가면 좋은 것을

늦은 오후 남편이랑 카페 투어

내가 하는 일은 주말 당직이 있다.

(과거는 야간당직도 있었다, 세상에나!)


당직을 앞둔 날이면 괜히 긴장된다.

아무 일이 없어도 긴장되고 일이 많아도 긴장된다.

그러니까 당직은 그 자체로 굉장히 쫄리는 업무다.


당직 날, 오전 10시면 당직 데스크에게 톡을 보낸다.

 

"선배 제가 오늘 당직입니다."


그러면 선배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루 무사히 잘 보내자. 수고하자고."


그러니까 당직은 모두가 무사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은 그런 날쯤 되겠다. 제가 그런 하루였다. 휴. 다행히 무사히 마쳤다.


그러니까 토요일 당직 있는 주말은 6일을 근무하고 일요일 하루를 쉰다. 주말에 근무한 날은 평일 대휴로 보상받는다. 혼자 일하기 때문에 피로감이 적지 않다. 그래서 토요일 근무한 날은 일요일에 주로 뻗어 있다. 그렇게 뻗어 있기만 하면 주말을 홀랑 날려버린 것 같아 아까울 때가 많다.


"오늘 나갈 거야?"

"응, 나가야지. 오늘은 자기랑 가고 싶은 카페 있어. 거기 가자."


그러던 게 오후 2시 반이다. 침대에 잠깐 누웠다. 남편이 와서 또 묻는다.


"커피 마시러 나간다며."

"응. 갈 거야. 가자. 15분만 누워있다 가자."


눈 떴는데 3시 반이다. 옆에서 같이 졸던 남편이 또 묻는다.


"3시 반인데... 나갈 거야?"

"가자. 가자. 그런데 그냥 요 앞 카페나 갈까? 거기까지 걸어가기 좀 귀찮다."

"그래 어디든."


더 늦으면 곤란하다. 커피 먹을 시간도 애매해진다. 후다닥 옷을 입고 모자를 썼다. 그런데 오늘은 일요일이잖아? 요 앞 카페가 문을 열지 않는 날이다. 나오니까 바람도 불고 시원하다. 무엇보다 기분이 좋아졌다. 방금 전까지 침대에 붙어있고 싶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카페 이름이 독특했는데 성경 시편이었네.

"그 카페 그냥 걸어갈까? 한번 먹으면 자기도 생각날 맛일 거야. 나는 단 라테는 안 먹는데, 실수로 거기 시그니처 라테를 주문했는데... 은은한 단맛이 딱 자기 취향이었어."

"나는 아무리 맛 있어도 일부러 그런 곳을 찾아가지 않는데?'


"아냐, 아닐 거야. 거긴 그럴 만한 곳이야."

30분 걸어 그 카페에 갔지만 우리는 시그니처 라테를 시키지 않았다. 으하하하. 흑임자라테 메뉴가 있었기 때문이다. 딸내미가 좋아하는 메뉴인데... 양양 놀러갔다가 강릉까지 가지 않았던가. 흑임자라테 먹겠다고. 흠흠.


남편은 나랑 커피를 마실 때면 단 커피를 먹는다. 바닐라 라테, 아인슈페너, 흑임자라떼 같은. 단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나? 그래서 먹었다. 흑임자라테, 나는 그냥 라테 아이스.

그때 카페에 4, 5살쯤 되어 보이는 딸아이와 부부가 들어왔는데 새삼 옛날 생각나더라. 둘째가 14살이니 10년 전에 우리 모습도 저랬을라나? 그랬더니 남편이 또 비밀 상자를 꺼내 보여준다. 남편이 내민 핸드폰 영상 속에 4살짜리 딸내미가 웃고 있다. 콧물 흘리는 바가지 머리를 한 소녀가.


그렇게 한동안 옛날 사진을 보면서 남편과 애들 어릴 적 이야기를 하는데... 세상에나 사진 속 장소가 생생하게 기억나는 거다. 저건 이천 미란다 호텔에서 찍은 거, 저건 제부도 글램핑장에서 찍은 거, 저건 예전 살던 아파트에서 찍은 거. 어제 일도 기억나지 않는 게 많은데 10년도 더 된 장소가 왜 생생하게 기억나는 거야.


짧은 카페 투어를 마치고 내일 오전에 애들 먹을 아침 거리를 빵집에서 사서 다시 걸어서 집으로 오는 길. 바람이 시원하다. 비가 또 오려나. 이번 주말에는 산에 못 갔네. 그래도 나왔으니 좋다. 나와서 걸었으니 되었다. 저녁 메뉴는 일찌감치 정해졌다. 피자다. 밥 안 해서 좋다. 이렇게 좋은 하루가 가고 있다. 그러니 나오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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