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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엄마는 글을 써요

자기만의 답을 찾아주는 글쓰기

by 은경

아낀다고 닳는 것도 아닌 마음, 아이들에게 펑펑 쓰겠노라고 큰소리친 사람 어디 갔나. 쥐구멍 아니 빈대 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다.


고3 딸아이 1호가 며칠 전부터 목이 아프다고 해서 약을 먹었는데 차도가 없었다. 기침으로 잠을 잘 못 자고 새벽에야 겨우 잠들었다는 아이는 학교를 제시간에 못 갈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병원에 가서 진료확인서를 떼면 학교에 언제 가도 상관이 없기에 좀 더 자고 싶다고 했다. 대신 나에게 담임선생님에게 문자를 보내달라고 했다. 병원 들렀다 간다고.


'병원에 가서 진료확인서를 떼고 가면 언제 가도 상관이 없다'는 거 나도 아는데, 그래도 일찍 갔으면 하는 마음이 앞선다. 학교도 늦게 가는데 그런 성의(?)라도 보여야 할 것 같아서다.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어릴 적 경험 때문이겠지. 나 때는 무조건 학교가 우선이었으니까. 아이들 학교는 우리 때와 다르다는 걸, 시대가 달라졌다는 걸 알면서도 비슷한 일이 생길 때마다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휴가 내고 싶은 봄날. 아이들이라고 다르겠나 싶고.

1호는 오전 9시에 일어나서 느긋하게 씻고 화장에 드라이까지 하고 오전 10시에야 집을 나섰다. 옆방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하고 있었지만 심기가 불편했다. '아픈데 화장이 웬 말이야. 선생님이 보면 아픈 애 같아 보이겠어? " 그래도 걱정하는 말이라도 해본다.


"이렇게 늦게 가면 점심은 먹을 수 있어?"

"응, 우리 급식 1시야."


"밥 먹고 금방 오겠네."

"아닌데, 야자(야간자율학습) 하고 올 건데?"


'야자 하고 온다'는 말에 상향세를 그리던 짜증 수치가 하향세를 탄다. 참말로 나는 쉬운 엄마, 문턱이 낮다 못해 다 닳아버린 엄마다. 아이들이 이걸 알면 참 좋을 텐데.


'그래, 야자하고 온다는데 뭘. 몸도 좋지 않은데 여유 있게 학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직장인도 아프면 쉬라는데, 학생이라고 예외일 리 없잖아.'


마음을 펑펑 쓰니 가는 말도 고와졌다.


'그래... 일찍 오게 되면 미리 알려줘, 저녁 준비해야 하니까.'


오후 4시 반에 울리는 카톡 하나.


"지금 집 가여, ㅎ"


성급한 기대였다. 이렇게 오늘도 야자를 째는구나. 의사 진단은 후두염과 기관지염 그리고 외이도염. 외이도염으로 이어폰을 낄 수 없다는 게 야자를 짼 이유다. 인강을 들을 수 없으니까.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맙다.


다음날은 토요일, 유일하게 하는 사교육 수학 과외가 있는 날이지만 아침부터 기침이 말할 수 없이 심하다. 이 상태로 수업이 되려나. 1호가 먼저 하지도 않은 말을 내가 꺼내버렸다.


"과외 못한다고 할까?"


0.000001% 정도는 기대했다. "아니, 그래도 해야지"라는 말을. 기대는 늘 어긋나기 마련이다. "기침 때문에 안 되겠어. 말하기도 어렵고." 그래 쉬어라, 쉬어야지. 아프면 쉬어야지. 나도 아프면 쉬고 싶은데 고3이라고 아픈데 공부하고 싶겠어? 아프면 쉬는 거야, 그래야 낫는 거야. 수십 번을 되뇌어 본다. 이 정도면 자기 암시, 자기 최면 아닌가.


과외 선생님에게 양해 문자를 보내자마자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1호. 내가 그러라고 했는데 또 기대하고 만다. 아픈 몸으로 분투해 주기를.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주길. 문제는 현실은 정반대라는 것. 이럴 때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서둘러 운동화를 신는다. 아이 때문이 아니라 이런 나 때문에 황금 같은 주말 하루를 망칠 수는 없으니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새벽에도 기침은 심했다. 아이 기침 소리에 내가 잠에서 깨 '응급실 가야 하나?' 생각했으니까. 다시 병원행. 그래도 이번엔 병원 오픈 시간에 맞춰 갔다. 택시를 불러줄까 했더니 버스를 타고 가겠단다. 여유 있게 가고 싶다나.


'그래 이 봄이 얼마나 이쁠까. 이 좋은 계절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한다고 안타까워하던 때도 있었는데... 버스 타고 느긋하게 학교에 가는 것도 뭐 나쁘진 않아... 그런데 넌 고3이잖아. 그렇게 여유 타령 할 때가 아닌데... 고3은 사람 아닌가. 버스나 택시나 차이가 뭐 얼마나 난다고. 괜찮아, 그 시간 때문에 될 게 안 되고, 안 될 게 되지 않는다고.'

고3에게도 봄은 봄이다. 이렇게 예쁜 걸 나만 봐서 미안해.

나는 하나인데 생각은 두 명. 왼쪽에 천사, 오른쪽에 악마가 하나씩 나를 뒤흔든다. 나는 이 싸움의 결말을 안다. 대부분은 천사가 이기는 게임. 내가 그렇게 살아왔다.


이따금씩 악마가 이기는 날은, 바닥을 치는 날. 기침을 이유로 월화 이틀 연속 야자를 째던 날 저녁이 그랬다. 공교롭게 둘째 아이 2호가 뇌관을 건드렸고 나는 폭발했다. '편하다고 막 하지 말라, 어린잎은 가랑비에도 다 찢긴다'라고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이 이모가 경고했는데 알면서도 그랬다.


설거지가 아니고 난타를 벌였다. 탁탁 퍽퍽 끄랑창창창. 일부러 뚜껑을 세게 던지다시피 한 것도 있었다. 그릇과 접시와 컵이 내는 불협화음이 난리도 아니다. 성숙한 엄마 어쩌고 했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둘째 아이가 짜증을 낼 때마다 감정적으로 그러지 말고 차라리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무엇을 해보라고 권한 사람 대체 어디 갔냐 말이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 쓴다. 방황 끝에 결국 돌아온 게 글쓰기다. 돌아보면 불안할 때마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마다 글을 썼다. 내 불안은 내가 돌봐야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니 또 머리로만 생각했던 불투명한 것들이 선명해지고 또렷해진다. 안갯속을 걷는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마음의 시야가 트인다. 그제야 보인다.


아이도 나만큼이나 불안할지도 모른다고. 왜 안 그렇겠나. 당사자인데. 그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나처럼 알아달라고 투정 부리지 않는 아이가 얼마나 대견하냐고. 아이는 아이대로 잘하고 있다고,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지금 제일 중요한 일 아니겠냐고. 그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느냐고. 내가 조급하게 생각해서 얻는 게 뭐가 있나 따져보면 시리도록 정직한 어투로 '없다'는 말이 되돌아온다. 그러니 차분하게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써본다. 지금 중요한 게 무어냐고.


왼쪽에 천사, 오른쪽에 악마. 누구 말이 옳은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둘에게 흔들리지 않도록 내가 중심을 잘 잡는 게 우선이다. 지난번 글에서 어느 분도 그러지 않았나. 나를 믿으라고. 불안에 이렇게 좋은 약이 없다. 이제 막 쓰기 시작할 때는 장황하고 다소 긴 하소연을 하게 되더라도 결국엔 자기만의 답을 찾게 도와주니 말이다. 내게 글쓰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ps. 둘째에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잘못한 걸 아는 데도 인정하지 않는 건 어른의 태도가 아니니까. 순간의 민망함도 잠시, 아이들의 마음은 생각보다 넓고 깊다. 그걸 또 한 번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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