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가 처음 맞이 하는 (우울하지 않은) 봄.
작년 11월 말에 유니클로 경량패딩을 산 뒤로 더 이상의 쇼핑은 없을 줄 알았는데, 봄이 왔다. 대략 2-3개월, 겨울 내내 같은 옷만 입고 다녔는데(3-4개를 돌려 입었습니다.) 3월 중순부터는 정말 입을 옷이 없어 난감한 상황이 생겼다. 인터넷 쇼핑도 한계가 있고 유튜브로 패션 공부를 해봐도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 친구에게 옷을 좀 봐달라고 했더니, 본인 옷장에서 이것저것 골라 입히면서 '퍼스널 컬러'라는 것을 봐줬다.
신기했다. 검은색과 회색을 주로 입는 나에게 흰색은 발표할 때나 입는 옷이라는 생각이 짙었는데, 진짜로 얼굴이 훤-해졌다. 베이지색이 패션의 기본색이라던데, 내가 베이지색 옷을 입으면 '퍼스널 컬러'가 안 맞는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어두워진다. 친구 말로는 베이지색과 하얀색을 섞어 입으면 괜찮아진다던데 물감도 아니고 뭘 어떻게 섞으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일단 친구가 요즘 안 입는 봄 옷들을 여러 개 챙겨줘서 일단은 여러 가지 색을 입어보고 있는데, 아직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는 것이 용기가 나지 않아 재킷과 카디건 등으로 열심히 가리고 다니고 있다. 그러나 조금씩 더워지면 이마저도 못할 테니 얼른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럽게도 몸무게는 조금씩 계속 빠지고 있다.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몸무게는 조금씩 빠진다. 다이어트를 해볼까? 싶어 운동을 늘려도 몸무게가 많이 빠지지는 않고, 대략 한 달에 0.5-1kg 정도씩 빠진다. 물론 500g 정도는 친구들과 술 몇 잔 마시면 또 금방 찌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우울증 약을 먹을 때는 운동을 늘리고 먹는 양을 줄여도 계속 살이 쪘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너무 기적같이 행복한 순간으로 다가온다.
언제였나? 출근 전에 신발을 신으며 옷매무새를 만지다가 "나 너무 뚱뚱해. 얼른 살 빼야지!"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다. 뚱뚱하다고? 살을 빼야 한다고? 입을 옷이 없다고? 투덜투덜 거리는 내 모습이 너무나 생경하면서도 동시에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너무 과도한 생각과 우울함에 잠식되어 이런 '가벼운' 고민은 생각도 못했는데. 이제는 투덜거리지만 출근을 하고 적은 돈이지만 스스로 입을 옷과 밥을 사고 친구들에게 생일선물도 보내는 사람이 되었구나 싶어 너무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이게 가능한 일이구나.' 싶으면서도 지난날들을 버텨온 나 자신이 너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유난히 혹독한 '봄'이라는 계절이 있다. 이유도 원인도 불명확하지만, 자살시도와 자살이 유독 많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봄에 버금가는 혹독한 계절이 또 있는데 그건 '환자 본인의 생일'이다. 이 역시 이유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라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그랬으니까 남도 그럴까? 싶어 감히 추측해 본다.
나의 삶이 나 스스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끄집어냈기에 이 모든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생일이 싫었고 다른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 일도 나에게 곤욕이었다. 적당히 웃어야 하고, 기분 좋고 행복한 척 연기해야 하니까 생일은 응당 그런 날이니까 우울해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더욱더 격하게 축하해 주니까 완벽하게 연기하거나, 가족 혹은 친한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고 핑계를 대고 집에 있어야 했다.
암튼 근데 그런 ㅈ같은 생일이 나는 또 굳이 '봄'에 있어 나에게 봄은 정말 너무 힘든 계절이었는데, 이상하리만큼 올해 생일에는 힘들지가 않았다. 아프지도 우울하지도 특별하지도 않게 그저 그런 하루로 잘 지냈다. 퇴근하고 운이 좋게 근처에서 일하는 지인과 만나 맥주 한 잔을 하고 너무 늦지 않게 집에 들어왔다. 정말 아무 일도 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생일이었다. 자책도 우울도 자살사고도 없는 평범한 하루가 되어버린 생일이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이것 또한 행복의 한 종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