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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da kim Mar 23. 2020

혼자의 맛

홍콩에서 맛본 여행자, 노동자로서의 ‘혼자’

2018년 1월, 입사하고 처음 해외 출장을 갔다. ‘처음’은 중요하다. 나는 무언가를 처음 할 때마다 플래너에 기록한다. 2020년 처음으로 들은 노래, 난생 처음 경험한 비건 식당 등등. 그러나 ‘첫 해외출장’ 만큼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사실 이 곳은 처음이 아니라는 것, 6년 만에 돌아왔다는 것. 여기는 홍콩이다. 나의 첫 해외 여행지. 언제고 다시 가리라 생각만 하다가 6년이 흘렀다. 이 도시가 일터가 될 줄은 몰랐지.


첫 홍콩’의 기억은 선명하다. 2012년 1월이었다. 비는 안 왔지만 두껍게 구름이 꼈다. 입국 심사는 건조했다. 여권을 받아든 직원이 힐끗 내 얼굴을 보더니 도장을 쾅. 끝. 빨간 캐리어를 찾자마자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혼자 왔으니 다른 이의 짐을 함께 기다릴 일이 없다. 첫 여행을 홀로 떠나기로 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나는 혼자가 디폴트인 사람이고 누군가와 동행하는 것이 예외다. 혼자는 편하고 자유롭다. 여행지를 홍콩으로 결정한 이유는 명확하다. <중경삼림>을 봤기 때문이다.  그 영화를 본 이상 나도 ‘California Dreamin’’을 들으며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북에서 ‘홍콩의 명물’이라고 일컬은 2층 버스가 들어선다. 나는 여행자답게 2층으로 올라가 제일 앞자리를 선점했다. 이국의 풍경을 정면으로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야자수가 드리워진 도로, 컨테이너가 가득한 항만을 지나 구룡반도의 중심 침사추이에 진입하자 나는 흥분 섞인 불안에 떨었다. 무질서한 도심. 그 중에서도 눈길을 잡아끈 것은 거대한 간판이었다. 어찌나 크고 가까운지 2층 버스에 부딪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버스에서 직접 찍은 사진 copyright(c)2012 by dada kim

대부분 한자와 영어가 병기되어 있는데, 가시성을 높이기 위해서인지 글씨가 거대했다. 넓기는 얼마나 넓은지 중국 대륙처럼 광대했다. 글자를 모두 품기 위해서겠지. 인상적인 한편, ‘이 도시는 규제가 없나?’ 궁금하기도 했다. 2012년 한국의 간판은 이미 규제를 거쳐 규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칸딘스키의 ‘차가운 추상’처럼, 직사각형 건물에 또 사각형으로 박제된. 그에 비해 홍콩 간판은 ‘뜨거운 추상’ 같다.

초보 여행자답게 숙소는 한인민박으로 예약했다. 특이 사항. 걸어서 5분 거리에 무려 청킹맨션이 있다. 왜 ‘무려’냐고? 참나, 당신 <중경삼림>을 안 봤군. 임청하가 레인코트에 선글라스를 하고 고독한 킬러로 활보한 무대가 바로 이 곳이라고.버스에서 내려 청킹맨션을 마주본다.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조명이 차갑고 사람은 많아서 내부가 잘 안 보인다. 동굴 같다. 들어가면 뭔가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누가 내 손목을 잡고 “당신 그 캐리어에 뭐 들었어.” 위협하는 거 아냐? 순간 흠칫했다. 스스로의 상상에 압도돼서는 아니고, 웬 남자가 나를 쿡 찔렀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니 그가 하는 말, “니하오”.

차갑게 무시하고 캐리어 손잡이를 고쳐 멨다. 임청하의 무표정으로 끌고 간다. 아스팔트에 플라스틱 바퀴가 갈린다.

 

숙소에 캐리어를 던지듯 내려놓고 뛰쳐나와 역시나 초심자답게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향했다. 스타의 거리와 심포니 오브 라이트. 바닷가라 그런지 바람이 차다. 한반도에 비하면 적도와 훨씬 가깝다 해도 홍콩만의 겨울이 있는 것이다. 시계탑 바로 옆에는 구룡반도와 홍콩섬을 잇는 스타 페리가 있다. 세상에, 배가 대중교통이라니 낭만적이다. 뭐가? 여행자의 눈에는 뭐든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copyright(c)2012 by dada kim

심포니 오브 라이트는 가이드북에서 소개하는 홍콩의 명물 중 하나로, 매일 밤 8시에 홍콩 빅토리아 항 고층 건물들 사이로 펼쳐지는 레이저 쇼 공연이다. 빅토리아 항은 홍콩섬에 있다. 침사추이에서 배로 건너갈 수 있는 곳. 내가 있는 스타의 거리는 홍콩섬을 마주보고 있으니 쇼가 잘 보이는 최적의 위치다.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계단에 풀썩 앉았다. 간간이 한국어가 들리지만 역시 귀를 압도하는 건 바닷바람과 중국어(아마도 광동어겠지?)다.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나는 이곳에 오롯이 혼자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로는 도저히 집으로 갈 수 없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간 다음달 휴대폰 요금이 어마무시하겠지.


숙소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바깥이 적막했다. 집에 있으면 엄마아빠가 티비를 보며 웃는 소리, 동생이 시끄럽게 키보드를 두들기며 게임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몸이 무겁고 눈에 핏발이 섰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썼다. ‘처음으로 해외 여행 왔는데 완전히 혼자야. 약간 무서워.’ 이제까지 푹 잘 수 있었던 건 가족의 존재라는 자장가를 들어왔기 때문인지도. 혼자의 맛은 식은 만두같다.



copyright(c)2018 by dada kim

다시 2018년 1월, 여행사가 공수한 관광 버스를 타고 쳅락콕 공항에서 곧장 일터로 간다. 일터는 홍콩섬 완차이에 있다. 이어폰을 끼고 마이 앤트 메리의 노래를 들으며 6년 만에 재회한 도시를 만끽하려 했건만, 가이드는 끔찍하게 성실했다. 고속도로와 항만, 해저 터널을 지나는 여정 내내 그는 맨 앞에 서서 마이크를 한시도 놓지 않았다. 그것이 의무라는 듯. 볼륨을 최대한 높인 것이 무색하게 마이크가 출력하는 그의 목소리는 이어폰을 뚫고 들어온다. “당신은 지금 일하러 왔지 놀러온 게 아닙니다. 아시겠어요?”라고 하는 듯했다. 6일 간의 출장, 피곤한 노동의 인트로였다.

6년 전 첫 식사로 딘타이펑에서 계란볶음밥을 먹으며 ‘이것이 홍콩의 맛인가...!’(주: 딘타이펑 본점은 대만에 위치한다.) 감탄했던 나는 6년 후 사장님들—거래처 사장님들도 함께한다—과 과장님 대리님 선배님 등등 사이에서 삼겹살을 굽는 신입이 된다. 홍콩에서 왠 삼겹살? 그것은 사장님들이 한식 아니면 안 먹는 20년차 비즈니스맨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양반들은 일정 내내 점심식사를 같은 한식당에서 해결한다!

누군가가 “내일 저녁은 우리끼리 따로 먹을 거야.” 라고 했다. ‘우리’라 함은 직원들을 의미했다. 저는 혼자가 그립습니다만. 속으로만 생각했다. 임청하의 무표정이 그리웠다. 정확히는 임청하의 무표정을 해도 눈치보이지 않을 자유가. 아무도 눈치를 주진 않겠지만 나는 막내니까.


한편 홍콩에 와서 신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들 매년 세 번씩, 최소 3년을 꼬박꼬박 출장으로 왔기 때문이다. 얼마나 심드렁하겠는가. 그들이 내 미래의 모습일지라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 삼일 째,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선배에게 일정을 물으니 각자 저녁을 해결하고 숙소로 바로 들어간다고 한다. 나는 번지는 미소를 참으며 말했다. “저는 일 끝나자마자 침사추이 갈래요.”

드디어 돌아간다. 여행의 시작점으로. 당연히 페리를 타고 건너갔다. 출장도 여행(Business trip)이니 낭만을 즐겨아지.

copyright(c)2018 by dada kim

구룡반도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쏟아졌다. 길가에서 촌스러운 카모플라쥬 무늬의 삼단 우산을 샀다. 비싸게 준 거 같다. 나일론 천이 어찌나 얇은지. 그래도 신났다. 비오는 침사추이 거리는 6년 전에도 겪어본 적 없었으니까. 고개를 숙이니 화려한 간판 조명이 젖은 땅에 반사되어 촉촉해 보였다. 중국어(역시 광동어일까?)와 신호등 소리가 온통 귀를 때렸다. 홍콩의 신호등은 한국과 달리 하루 종일 댕, 댕, 하는 소리를 낸다. 빨간불일 땐 느긋한 박자로, 초록불일 땐 도도도 빠른 박자로. 귀에 얼얼한 잔상이 남는다.

나는 임청하의 무표정을 장착하려 했지만 그리웠던 시청각 자극을 온몸으로 맞고 있으려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혼자는 맛있다.



3달 후, 다시 출장길에 오른다. 4월 홍콩은 겉옷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하루 종일 충분히 덥고 습하다. 그러나 나는 가디건까지 갖춰 입고 밤거리를 걸어다닌다. 가디건은 해가 질 때까지 실내에서 일하다 퇴근한 흔적이다.이 도시의 가로수는 야자수지만 실내에서는 1년 365일 에어컨이 펑펑 돌아간다. 4월이라고 반팔 차림으로 있다간 감기 걸리기 쉽상이다. 출장 일정동안 나는 폴리에스터 재질의 질감이 까끌한 꽃무늬 블라우스에 몸에 붙는 긴 바지를 주로 입었다. 오전 8시 20분, 청록색 가디건을 걸친 후 굽이 낮은 로퍼를 신고 호텔을 나선다.오후 6시 30분. 퇴근하고 회사 사람들과 헤어져 혼자 완차이 대로변을 걸어간다. 일하는 동안 틈틈이 검색해서 오늘 갈 식당을 정하고 구글 지도에 책갈피 표시를 꾹 눌렀다. 그 곳으로 가는 것이다. 걷다 보면 등부터 팔까지 끈적한 땀이 번지고, 블라우스가 몸에 달라붙고, 가디건을 벗고 싶어진다. 벗고 싶어지는 그 순간이 좋다. 자유의 증거이므로.

copyright(c)2019 by dada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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