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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da kim Apr 09. 2020

사랑의 순간들

감 좋아하세요?

희안하네. 오후 세시만 되면 배고프다. 점심에 먹은 김치찌개는 어디로 사라진겨. 사무실 냉장고에서 도시락을 꺼내와 뚜껑을 연다. 오늘은 무슨 과일일까? 엄마는 늘 과일을 서너개쯤 싸준다. 조합이 바뀌는 걸 보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요즘 나를 제일 즐겁게 하는 과일은 감. 누렇게 속살이 드러난 사과 조각, 새빨갛고 큼지막한 토마토 조각 사이를 나무꼬지로 뒤적이면 토마토와 사과를 섞어 나온 듯한, 옅은 주황색의 감 조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무꼬지는 감을 먼저 찌른다. 한 입 베어물면 입 안에서 아삭하게 쪼개지는 단단한 과육. ‘과육‘이란 단어와 제일 안 어울리는 과일이 지금 상태의 감 아닐까? 손으로 꾹 눌러봐도 비집고 들어갈 틈을 안 주니 말이다.


“사무실에서 먹어.” 아침에 가장 익숙한 소리. 샤워를 하고 나올 때마다 듣는. 엄마가 과일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써는 소리다. 출근 준비를 끝내고 방에서 나오면 과일 도시락과 빵이 든 가방이 식탁 위에 대기하고 있다. 도시락 가방을 기울여 안을 슬쩍 보고 지퍼를 잠근다. 오늘은 소세지 빵이군. 엄마는 어느새 거실 소파에 반쯤 누워서 티비를 보고 있다.

“갔다 올게에.” 손을 흔들면 엄마도 현관에서 신발을 구겨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같은 동작을 한다. 언제부터 배웅을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오전 시프트 시절 엄마는 출근 준비로 바빠서 늘 주방에서 분주히 가족들 먹을 밥을 지었다. 내가 인사를 해도 등을 보이며 “어“ 정도로만 짧게 대답했다. 출근 시간이 늦어진 후로 엄마는 약간 여유로워 보인다. 딱 나를 배웅할 만큼만.




우리 가족이 선호하는 감 종류는 각각 다르다. 엄마는 연시를 좋아한다. 내가 카카오몽쉘을 좋아하는 것처럼. 내가 몽쉘 6개들이 한박스를 책상서랍에 숨겨놓고 혼자 다 먹는 것처럼. 집에 돌아오면 이따금 식탁에서 혼자 연시를 먹는 엄마의 등을 본다. 숟가락 가득 떠서 한 입, 그리고 앙상한 껍질만 남도록 남김없이 해치운다. 엄마가 떠난 식탁 위 연시가 곤충의 허물처럼 푸석하다. 아빠는 딱딱한 감을 좋아한다. 당신 입으로 “나는 딱딱한 감이 좋소“라고 들은 적은 없지만 엄마는 늘 아빠 먹으라고 딱딱한 감을 사온다. 동생은 내 알 바 아니다. 사실 우리집의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 그것은 엄마아빠가 모두 나가고 없는 주말 점심에 일어난다. “오늘은 햄버거?” 동생은 “어휴 또 햄버거?” 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짓지만 저게 다 내숭이거든. 아니면 햄버거를 먹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


나는 곶감에 환장한다. 곶감만으로 한 시간짜리 먹방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자주 먹을 수 있는 간식은 아니라 애틋하기까지 하다. 명절 때나 맛보는 별미. 이따금 마트에서 곶감 코너를 발견하면 눈을 떼기가 힘들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겨울을 준비하는 다람쥐처럼 볼 한가득 곶감을 쑤셔 넣는다. 얼마 전 냉동실을 열었는데 아니 글쎄 곶감이 세 봉지나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빵빵하게! 누가 사왔지? 한 봉지에 20개는 족히 들어있는 듯했다. 오늘이 실은 설날이었나? 제사 없는 설날이라니 축제 아닌가. 접시에 세 개를 담아 방으로 들어왔다. 연달아 해치우고 빈 접시를 들고 나와 세 개를 또 꺼내 먹었다.


며칠 뒤. 새벽 다섯 시 엄마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

“다영이가 곶감 한봉지를 싹 비운 거 있지?”


다음 날 아빠는 “내 곶감 왜 니가 다 먹냐?” 타박하더니 두 봉지를 더 사왔다.




지난 3월에 엄마와 나는 외가에 갔다. 코로나로 교회도 못 나가고 노인정 친구들과도 당분간 못보게 된 할머니와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할머니가 얼마나 심심하겠어. 가서 밥 먹고 오자.” 엄마는 냉동실에서 양념갈비 한 팩과 곶감 한봉지를 꺼내 가방에 넣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고기며 야채, 과자를 잔뜩 사갔다. 과자는 나보고 고르라기에 초코파이 흑임자맛을 골랐다. 한 번도 안 먹어봐서 궁금했거든.

도착하자마자 주방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회색 스웨터 위에 빨간색 누빔 조끼를 입은 할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팔을 벌린다. 그는 나를 빈틈없이 꼭 안아주며 양손으로 볼을 비볐다. 할머니의 크고 두꺼운 손이 양볼을 꾹 누르면 살이 안으로 쏙 들어가서 한동안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기분좋은 사랑의 압력. 감히 코로나가 할머니의 사랑을 막을 순 없는 것이다.


양손에 들었던 장바구니를 내려놓은 엄마는 집에서 가져온 곶감을 먼저 꺼냈다.  차례대로 짐을 푼다. 양념갈비, 오늘 점심으로 먹을 삼겹살 두 팩, 상추 한 봉지, 단호박 두 통, 내가 맘대로 고른 초코파이 한 통,… 할머니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곶감이었다. 엄마가 곧장 눈치채고 엄마의 엄마에게 말한다. “곶감 하나 먹어봐.” 할머니는 “아이고 점심 먹은지 얼마 안 됐는데” 하면서도 곶감 봉지를 뜯었다. 두 입만에 사라지는 주먹만한 곶감. 아 내가 할머니를 닮았구나. 내 취향의 기원이 여기 있었군. 우연히 발견한 할머니와 나의 연결. 기분이 좋아졌다. 잠이 나른히 쏟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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