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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남자 팀장, 육아 휴직을 신청하다

"정신 나갔어요? 육아 휴직을? 팀장이? 지금? 이 시국에?"

라는 답이 되돌아 오는 장면에서 눈을 떴다. 아, 현실이 아니었구나.


몇 달 전부터 와이프와 육아 휴직을 해보면 어떨까라는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아이는 아직도 또래의 아이에 비해 많이 왜소하고, 아직도 잠을 못 잔다. (우리 아이는 22개월이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의 현실과 돌봐주실 수 있는 양가 부모님의 지원을 기대하는 것이 어려운 우리 부부의 상황은 육아를 이모님이라 불리는 상주 도우미에게 거의 일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밤에 갑자기 놀라서 아빠 엄마를 울면서 부르며 잠에서 깨어난 아이의 마른 팔다리와 드러나는 갈비뼈를 내 가슴과 팔뚝으로 안아 달래는 순간마다 아이에 대한 걱정은 죄책감으로 자라났다.


"역시 아이는 부모가 키워야 하는 걸까"

이런 얘기는 우리 부부가 아이를 키우는 내내 주고받았지만 그래도 낮에는 이모님과 해맑게 웃고 잘 뛰어놀고 낮잠도 잘 자는 아이를 보면서, '그래, 밤잠은 언젠가 나아질 것이고 살은 곧 쪄서 통통해 보이겠지. 그래도 키는 개월 수에 맞게 자라고 있는 거 같으니 말이야.' 하며 그 마음을 접고는 했었다. 또 아이와 함께 한 1년 동안 거의 매일매일 아이가 밤에 깨어 울어도 짜증 한 번 안내는 이모님을 보면서 그 너그러움과 인성에 감사하며, 지금의 맞벌이는 나중에 우리 아이를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게 해 주기 위한 엄마 아빠의 준비라고 다짐을 하게 됐었더랬다. 그렇게 부부 중 누군가가 육아휴직을 써서 아이와 부모가 함께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논의는 실행 여부에 대한 결정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은 채, 우리 부부의 대화의 수면 위에 만조와 간조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식이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능력에 비해 과분하게 세간에 우리 회사 이름을 못 들어본 사람은 없을 정도의 큰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또 어찌어찌하다 보니 능력에 비해 과분하게 팀장이라는 자리에 앉아서 '대기업 남자 팀장'이라는 뭔가 적혀있는 글씨만으로도 보수적일 것 같고 네모난 틀에 박혀있는 것 같은 자리에서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또 아마도 대한민국 98%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마음속 한편엔 내가 이놈의 회사 언제든지 그만둬야지 하는 염증 섞인 소원의 보따리를 두고 매일매일의 출근을 달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퇴사라는 소원을 강제로 이룸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의 월급과 직책에 쪽팔리지는 말자는 나름의 다짐과 팀장이라는 자리에 부족하다는 소리가 날까 하는 두려움을 바탕으로 그래도 내가 하는 일은 우리 회사를 위한 일이며 그 보상은 내 월급으로 돌아올 것이다는 일종의 소명의식도 적당히 가지면서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퇴근하고 아이와 아내의 손을 잡고 밤 산책을 했던 날 양쪽으로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매달리듯 걸어가는 우리 아이가 '까르르, 까르르' 웃어대며 고개를 돌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순간 우리 가족 셋의 모습을 몇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관조하는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치 의장대와 같이 나열한 가로등 조명이 어두워진 아파트 정원을 비추어 만들어진 황금색과 같은 노란색의 길 사이를 아빠, 엄마, 아들 셋이 함께 걸어가는 그 이미지는 '완벽한 행복'이라는 단어로 밖에 표현이 안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 사춘기 소년 때 처음으로 컴퓨터가 생겨 학교가 집에 가서 빨리 게임을 하고 싶어 했던 그런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루빨리 그런 행복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또 자라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도 아이는 계속 살이 안 찌고 마른 상태였고, 잠은 여전히 잘 못 자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밤마다 신생아처럼 울며 깨고 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동시에 죄책감은 계속 자라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성실히 출근을 하고 있었고, 때로는 보람을 느끼고 때로는 성취감을 느끼고, 때로는 좌절감을 느끼면서 권태롭게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동시에 가로등 의장대가 사열하여 비추는 길을 걷는 꿈은 계속 이루고 싶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어야 했는데, 그게 제일 아쉬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며칠을 병원에서 함께 지냈을 때 아주 어렸을 적 이후 처음으로 어머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었다. 어머니가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얘기들, 예를 들어 이제는 두려움이 없다던가 하는 식의 그런 얘기들과, 내가 엄마한테 더 잘했어야 했는데 너무 미안하다는 사죄의 표현들, 그리고 곧 태어날 내 아이에 대한 얘기들을 그 며칠 동안 밤에 어머니와 주고받았었다. 어머니는 정말 자식들이 잘 자라서 결혼하고 당신들 걱정 안 시키고 살아주는 것만으로 이미 나와 내 동생에게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는 그런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후회를 섞어 얘기하셨던 거의 유일한 말씀이 '이렇게 되고 보니, 하고 싶었던 것들을 다 하고 살았어야 했는데, 그게 제일 아쉬워'라는 얘기셨다. 그러면서 내게 '아들아 너는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아. 그렇게 살아야 해.'라며 조언을 주셨더랬다.


그 장면이 어느 날 밤새 내 꿈에서 반복되었다.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끝이 났다.

"아들아 너는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아. 그렇게 살아야 해."

눈을 떴고 저녁에 아내와 육아 휴직에 대해서 다시 얘기를 나누었다. 만조와 간조처럼 우리 부부의 대화의 수면에서 오르락내리락하던 육아 휴직은 그렇게 마음속에서 굳게 마음 먹힌 결정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회사에 이 얘기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였다. 남성의 육아휴직이 보편화되어 가는 추세이긴 했으나 아직 우리 회사에서는 그렇게 일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게다가 '대기업 남자 팀장'이 육아 휴직을 쓴 전례는 일단 내가 알아본 바로는 우리 회사에서는 아직 한 명도 없었다. 마침 우리 팀이 중심이 되어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도 하나가 있었고, 워낙 코로나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산업이라 회복이 점쳐진다는 지금 시점에 회사에는 할 일이 넘쳐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육아 휴직을 하겠다고 말해야 할지 머릿속에선 수 십 가지의 변형된 시나리오가 시뮬레이션되어 떠다녔다. 어떻게 말을 꺼낼 것인가. 당당한 자세로 통보를 할 것인가, 적절한 비굴함으로 동정을 구하는 연기를 할 것인가. 어떤 내용으로 말을 할 것인가. 아이가 많이 아프다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행복이 필요하다고 말할 것인가. 반복된 시뮬레이션으로 아내와 결정한 육아 휴직은 아직 가정 내 결정 사항일 뿐 회사에 전달되지 못하고, 내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꿈을 꾸었고 꿈의 끝은 항상 똑같았다.

"정신 나갔어요? 육아 휴직을? 팀장이? 지금? 이 시국에?"


현실에서의 발화는 의외로 갑자기 튀어나왔다. 오늘은 반드시 말하리라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었고, 그날은 사고(思考) 연습을 많이 한 날도 아니었다. 보고를 할 건이 있어 상사인 상무에게 보고를 하러 들어갔다, 보고가 끝나고 갑자기 '육아 휴직을 해야겠습니다'라는 말이 정말 말 그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그렇게 육아 휴직을 신청하게 되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내게 날아왔던 날카로운 대답들은 현실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육아 휴직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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